인간은 누구나 알몸으로 세상에 나왔지만 뭔가를 걸치며 산다. 계절별로, 취향별로 혹은 성별로 조금씩 혹은 크게 차이가 난다. "옷이 날개"란 말도 있고 옷을 잘 입으면 자신의 부족한 것을 보완할 수도 있을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더운 지역 오지에 사는 원주민들은 몸의 주요 부분만 가리거나 어떤 경우는 아예 몸 전체를 노출한 채 아무 거리낌 없이 지낸다. 프랑스의 어느 해수욕장에는 나체로 해수욕을 한다고 한다. 웃긴 얘기긴 하지만 알몸으로 지낼 경우라면 옷을 입는 경우에 비해 몇 가지 좋은 점도 있을 것 같다. 우선 뭘 걸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그만큼 비용도 줄일 수 있다. 또한 보다 가식 없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냄에 따라 숨길 것 없는 삶을 살고 이를 서로 나눌 수도 있으리라 본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야 모르지만 인간은 원시시대를 제외하곤 몸에 뭘 걸치는 게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이 점에서 인간은 헐벗은 채 생활하는 장점을 포기한 건 아닌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옷에 뭘 걸치며 미관상으로 나아 보인다든지 생각하며 한 단계 발전했다고 생각할진 모르지만 달리 생각하면 한 단계 퇴보한 건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인간 스스로는 알몸 대신 겉치레를 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을 그전에 없던 형식 속에 가두어 버린 것은 아닐까?
인위적인 것은 비단옷에 국한될 것만은 아니다. 화장에 미용에다 성형이란 과거에 없던 합법적인 의료 기술까지 유행하기도 한다. 심하게 말하자면 인간은 현재 본래의 걸치지 않은 모습에서 조금씩 위장하고 있고 스스로도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는지? 또한 대인관계에서 만일 자신은 꾸밈없이 속 마음을 드러내 보이는데 상대는 그렇지 않고 그걸 오히려 이용할 경우 가식 없는 사람은 졸지에 멍청한 사람이 되는 수도 있다. 따라서 결국 인간들 간에 서로 이리저리 재며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세상이 되어가게 된다.
과거 20대 때 부티나는 옷을 입기 좋아하는 한 친구가 있었는데 내가 "부도 없는 사람이 부티만 낸다고 뭐가 되냐?"라고 물었는데 그 친구 얘기는 "부가 없으니 부티를 내는 거"라고 하였다. 달리 말하면 돈이 있는 사람은 따로 부티를 내지 않아도 남들이 알아주지만 돈이 없는 사람의 경우는 돈을 빌어 비싼 차를 타거나 아니면 명품 옷이나 가방이라도 가지고 다녀야 남들이 그래도 관심을 보여 결국 자신이 원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어찌 보면 알몸에서 겉치레가 늘면서는 이렇게 거꾸로 혹은 다소 위선적으로 처신하는 게 세상을 사는 방식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씁쓸함이 남는다.
80년대 미국의 대통령 레이건은 언변이 뛰어난 지도자로 명연설을 하곤 했다. 한 번은 그가 UN에서 대표연설을 한 적이 있었고 국내에서도 그 연설에 관해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 때 지금은 고인이 된 김용식 외무부 장관의 말이 "가장 훌륭한 연설은 진실성이 느껴지는 연설"이라 말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새 가식과 위장과 과장이 판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결국 조미료로 낸 맛은 원래 재료의 맛을 능가할 순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