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에서 기쁜 일이 생기면 머지않아 반대의 일이 또 생긴다. 슬픈 일이 생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기쁜 일이 발생할 때엔 기쁨 속에 도취만 하지 말고 다음에 찾아올지 모를 슬픔을 한번 정도는 떠올릴 필요도 있다. 또한 주체 못 할 슬픔이 찾아올 경우에도 이게 다는 아니라 생각하고 곧 찾아올 기쁨의 시간을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간혹 슬픈 일이 계속 이어질 경우 머지않아 올 기쁨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 채 슬픔만 이어질 걸로 단정하며 삶을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는 한마디로 단편적인 생각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기쁨은 화창한 날, 슬픔은 궂은날로 볼 때 세상에 기쁨만 있다면 온 천지가 사막이 되고 세상에 슬픔만 있다면 젖은 자리만 있어 발 디딜 곳이 없어질 것이다. 따라서 맑은 날이 있으면 궂은날도 있고 궂은날이 있으면 맑은 날도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궂은날 눅눅함을 견딘 다음 창밖으로 화창해진 하늘을 대하면 그동안의 갑갑함이 사라지고 기분이 하늘을 날듯 상쾌해진다.
슬픔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솔직히 기쁨을 누릴 진정한 자격이 없다. 입시에 낙방한 쓰라린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합격의 영광을 몸으로 느낄 수 있으며 굶어본 사람은 음식의 감사함과 소중함을 배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젊은 시절 순수함만으로 사랑에 도전했다 현실의 벽에 부딪쳐 실연의 고배도 마셔본 사람이 결혼식의 축가와 하객들의 축하 박수를 들으며 보다 성숙한 사랑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기쁨은 이전에 있던 슬픔의 고통과 겹치는 것이라 쉽게 혹은 누군가가 만들어준 기쁨은 오래가지 못할 뿐 아니라 진정한 기쁨이라 할 수 없다.
프로야구가 1982년 출범한 후 우승 문턱에서 줄곧 준우승만 경험했던 빙그레 이글스가 1999년에 드디어 우승의 샴페인을 터뜨렸다. 선수 모두는 감격에 겨워 모두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줄곧 TV 화면이 아닌 라디오를 통해 노래가 들려지던 한 무명가수가 '열애'란 노래로 1980년 초 가요대상을 차지할 때 그녀는 무대 위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이름은 윤시내. 어려운 과정 없이 쉽게 유명해진 가수라면 그 흐르는 눈물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춘향전이란 소설에서 이몽룡은 과거에 급제하여 어사가 되어 남원에 내려온다. 그때 옥에 갇혀있던 춘향에게 왜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신분 차이에도 불구 이몽룡은 성춘향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괴로운 마음을 가볍게 하기 위해 자신이 출세해서 돌아왔음을 밝히면서 춘향을 안심시켜야 하건만 정반대로 고통을 연장시킨다. 슬픔의 고통을 더욱 키워 기쁨을 배가시키려 했던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