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단계

by 최봉기

남자가 이성을 만날 경우 차분한 스타일, 화통하거나 혹은 소탈한 스타일 등 선호하는 유형이 각기 다르다. 이십 대 초반에 나는 나이답지 않게 디스코텍에서 만난 여자랑 사귀는 친구를 보면 왠지 천박해 보였다. 주로 차분하고 지적이며 분위기 있는 여자를 좋아했고 누나가 없어 그랬는지 연상의 여자들이 좋아 보였다. 예순을 눈앞에 둔 지금 나이엔 연상이든 연하든 그게 그거지만 그때는 여자를 너무 몰랐고 남녀관계란 게 그 속에 뭔가 보물이라도 감춰져 있는 듯한 환상 속의 그림과도 같이 보였다. 이러한 순수함과 이성에 대한 동경만으로 사랑을 생각하는 단계에서는 아직 경험하지 않았고 앞으로 결국 지나가야 하는 험한 길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순수함만으로 이성을 그리던 한 남자가 한 연상을 흠모하지만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슬픈 영화가 있다. 1999년 제작된 이병헌, 이미연, 전도연 주연이었던 '내 마음의 풍금'이다. 한참도 전에 사범학교를 갓 졸업하고 강원도 산골 산리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21세 강수하(이병헌 분)은 함께 부임한 연상의 양은희(이미연 분)과 같이 일한다. 그녀는 지적일 뿐 아니라 세련미와 청순미를 가진 여성으로 연하남인 수하를 정감 있고 진지하게 대해 주면서도 이성이라기보다 동생과 같은 느낌을 받는데 수하는 그런 은희에게 점점 호감을 가지게 된다. 음악 LP판을 통해 둘은 교감이 더욱 커진다. 여기서 수하를 사랑하는 17세 늦깎이 초등학생 홍연(전도연 분)은 두 남녀가 가까워지는 것을 시기하는 눈으로 본다. 두 사람이 교실에서 함께 풍금을 치는 걸 본 아이들은 화장실에 그 모습을 그려 놓으며 둘이 마치 연인이 된 것처럼 소문을 낸다. 그러던 중 은희는 결혼을 해서 유학을 가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수하는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 속에 휩싸인다. 20대 초반에 세상을 잘 모르는 순수한 한 남성이 현실의 늪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조차 못하며 좌절하는 모습은 애처롭고 극도의 비통함과 씁쓸함만 남긴 채 막이 내려진다.


이러한 실연의 과정은 마음이 순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겪는 홍역과 같은 과정일 수 있다. 나의 경우에도 대학교 1학년 때 몇 살 위 여성을 우연히 대성리에서 보트를 타다 만나 편지를 하고는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영화 속 은희와도 같이 연하인 나를 진지하게 대해줬지만 몇 년씩 사귀어 온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후 3학년 때 같은 과의 동기와 알고 지냈는데 그쪽도 나를 좋아는 했지만 당시에 서로 현실적인 조건이 너무 맞지 않아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끝나게 되었다.


남녀가 만나 서로 좋아 지내더라도 결혼에 골인하려면 서로 인연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 인연이란 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일이 잘 풀리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안 되는 일은 암만 노력을 해도 헛바퀴만 돈다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기에 그러하다. 반면 서로 인연이 될 경우라면 닥치는 어려움도 서로 손을 맞잡고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난 다음엔 현실도 알게 되고 여자란 존재에 대한 막연함도 구체화되며 뜬구름이나 잡고 가슴 태우며 보냈던 세월이 이젠 엄연한 과거가 되고 이제는 땅에 발을 굳건하게 딛고 눈은 하늘을 향하며 근사한 집을 설계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지은 집에서 비바람을 피하며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 함께 살며 자녀도 낳아 행복이란 열차를 타고 무지개 나라를 향해 달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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