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덥고 가물 때 한 번쯤 비가 쏟아지면 더운 공기도 차가워지고 해갈도 된다. 또한 공기 속의 먼지 청소와 함께 세차도 할 수 있어 비는 많은 유익함을 주지만 여행, 등산 혹은 나들이엔 김을 팍 세게 하는 불청객이 되기도 한다.
비 오는 날 라디오를 켜면 비와 관련된 노래들이 나오는데 빗속에 감춰진 온갖 사연들은 미래보다는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우울함을 안겨준다. '빗물', '찬비', '비처럼 음악처럼', '가을비 우산 속에' 등이 모두 만남의 기쁨보단 이별의 아쉬움과 비애를 주로 담고 있어 청소년들에게 정서상 별로 좋지 못한 측면도 있다.
비는 또한 인간을 감성적으로 빠지게 하는 묘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 한 친구는 고교시절 알던 여자 친구가 이민을 가게 되었는데 그녀를 보내고 마음이 하도 우울해져 온몸이 흠뻑 젖도록 비를 맞고 걸었던 적이 있었다고 했다. 또 한 지인은 집안 일로 머리가 아픈 차에 아무 생각도 없이 비를 맞고 걷다가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예기치 않게도 거기서 한 목사의 설교를 듣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갔던 장소는 다름 아닌 여의도의 순복음교회였고 설교자가 조용기 목사였다고 한다.
나의 경우에도 초등학교 때 비가 쏟아지는 날 텅 빈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몇 시간씩 공을 찬 적이 있었다. 몸이 흠뻑 젖는데도 별생각 없이 달렸는데 처음에 옷이 젖을 때엔 기분이 얄궂지만 험뻑 젖은 후엔 비에 취해 몸이 젖었다는 사실도 망각했던 것 같다. 또 한 번은 한여름 함양의 지리산 줄기 칠선계곡에 갔는데 땡볕 속에서 땀 흘리며 걷던 중 비가 갑자기 쏟아져 몇 시간 산길에서 비를 맞고 걸으며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기도 했다. 이 또한 비와 관련된 이색 체험이었다.
인간들과는 달리 비가 오는 날 계곡에 사는 개구리와 그 친구들은 황홀함에 취해 잔치를 벌이는 건 아닐까 싶다. 물이 불어나고 깨끗해져 물놀이를 하기도 좋고 모처럼 산뜻함을 느끼기엔 최상의 조건이 되리라 보인다. 나무나 풀 그리고 꽃들도 빗방울 아래에서 기쁨을 만끽하고 생명 가득한 메시지를 나누며 친교의 시간을 가지기에 최고인 게 비 오는 날일 것 같다.
비가 오면 여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 집 저 집 칼국수나 파전 같은 음식을 하기도 하며 간혹 팥칼국수가 등장하기도 한다. 남자들은 기분은 약간 처지지만 가까운 벗에게 연락이라도 하여 저녁시간 술집을 찾기도 한다. 빗소리를 들으며 대지가 촉촉해질 땐 목도 촉촉 적셔가며 추억에 젖는 것도 운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흔히들 "살다 보면 맑은 날이 있으면 궂은날도 있다"라고 한다. 화창한 날은 일이 잘 풀리는 때라면 궂은날은 일을 하지도 못하고 공치는 날 혹은 힘 빠지는 우울한 날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듯 궂은날도 있기에 맑은 날이 더 의미로울 수 있는 건 아닐까? 이성적이고 진취적인 삶의 이면에는 이러한 감성적이고 과거를 돌아보는 때도 필요는 하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