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이라 무덥지만 장마철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간간이 음악을 듣기도 한다. 빗소리와 기타 소리는 비슷하고 마음에 와닿는 느낌까지도 그러하여 둘 사이엔 묘한 조화로움이 있다. 내가 어린 시절 당시 다니던 성당에는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어른들이 더러 있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놀이문화가 다양하지 않아 TV나 라디오 혹은 독서나 영화 정도를 빼면 여유시간 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악보를 펴놓고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것이 젊은이들의 오락이었다
음악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꽤 큰 것 같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음악 시간이 있었고 입학식과 졸업식을 포함해 주요 기념식 때에 늘 노래가 함께했다. 그런 공식적인 음악 외에 스스로 음악을 들으면 기쁠 땐 기분이 더 좋아지고 슬플 땐 위로도 되어 누구나 음악을 즐긴다.
오늘은 유튜브에서 70년대 통기타 가수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세상을 한동안 시끄럽게 하던 '세시봉 콘서트'의 주역이 인터뷰 형식으로 당시 대중가요에 얽힌 추억들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들의 말과 노래도 흥미로웠지만 그들이 활동할 당시 10대나 20대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슨이나 일흔 나이가 되어 객석에 앉아 보이는 반응이 남다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중년 내지 노년인 여성들이 과거의 추억에 잠겨 눈을 감고 노래를 음미하기도 하고 곳곳에 앉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모름지기 음악을 통해 추억을 되뇌는 것 같다. 당시 10대였던 나는 낭만이 뭔지 모르면서 어른들이 즐기던 낭만을 곁눈질하였다.
지금 10대나 20대들은 따로 부연 설명을 해줘도 그 시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장기집권으로 독재를 하던 때라 '자유'나 '저항'의 냄새가 나는 노래는 곧장 금지곡이 되었다. 대학생들이 유신반대 데모를 하다 걸리면 강제징집을 당했으니 젊음이 숨 쉴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현실 속에서 잃어버린 꿈을 찾아 부르던 노래가 '고래사냥'이다.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동해에 가면 고래가 살고 있는데 그 고래를 잡으러 간다는 가사는 지금 시각으로 볼 때에는 비정상적인 일이지만 당시로는 지극히 정상적이었다는 사실이 쓴웃음을 짓게 하기도 한다.
우리 윗세대가 추구했던 낭만은 지금보다 훨씬 못 살던 시절 팝송을 접하며 낭만을 찾고 '행복의 나라'를 갈구하였다. 그다음 우리 386 때는 광주학살을 규탄하며 또 다른 저항을 했던 때였다. 우리 세대는 팝송을 듣고 미국을 막연히 동경했던 윗 세대와 달리 광주나 5 공화국과 관련한 반미감정이 싹트며 우리의 고유한 정서를 주제로 한 노래를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우리 자녀들은 민주화되고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에서 또한 이제는 세계가 우리를 동경하는 한류 속에서 낭만을 찾고 있다. 이들도 과거의 애환과 삶의 고뇌 정도는 공감하며 저들의 낭만을 추구해 마지않길 바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