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의 재조명

by 최봉기

나이를 먹게 되면서 세상에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존재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어릴 적 교회에 다닐 때엔 세상은 교회로 대표되는 선과 마귀로 대표되는 악만 있는 걸로 보였다. 성서에 따르면 인간이 하느님 말씀을 어기고 마귀의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그 후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함으로써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죄를 짓고 죽으면 지옥에 가므로 교회에서 하느님을 믿어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러한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 때문에 청소년들이 짧은 머리로 골목이나 독서실 옥상 등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볼 때엔 마치 악의 화신 마귀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이들도 대학에 진학하면 계속 흡연자가 될 터인데 장발 머리를 한 사람들의 흡연 모습은 괜찮아 보였기에 그들의 청소년 때 흡연 모습은 연상되지 않고 덮여 버렸던 것 같다. 지금 생각엔 편견이 강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현재 바라보는 세상은 그때와는 차이가 크다. 마귀는 눈에 보이진 않지만 마귀가 인간을 계속 유혹한다는 것 정도는 받아들이는 편이지만 어릴 때 생각대로 교회가 선을 대표한다는 생각엔 공감이 잘 가지 않는다. 교회란 곳이 하느님을 예배하는 곳이지만 그 속에 하느님이 계실지는 의문이다. 지금은 교회가 별로 성스럽지도 않아 보이고 교인들 간의 사랑도 느껴지지 않으며 주일이나 부활, 성탄 때에 사람들이 붐비는 곳 정도로 느껴진다. 화제를 바꿔 "학문의 전당이자 상아탑인 대학교는 깨끗한 곳인가?"라고 물어볼 때 교수의 '제자 성추행', '공금 횡령', '제자 논문의 명의 도용' 등 별 일 다 생기는 곳이 대학인데 과연 깨끗하단 말을 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교회도 성스러운 곳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존재에 대한 감사함보다 헌금을 낸 만큼 복을 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모인 집합소 같다.


1979년에 나온 이문열의 소설 '사람의 아들'에서는 선과 악의 문제를 여러 가지 형태로 보여주며 선과 악을 빛과 어둠에 견주기도 한다. 어둠이 없다면 빛을 알 수 없듯이 세상에 악이 있어 선을 알 수 있으며 악이 없다면 선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성서에서 금기시하고 돌로 쳐 죽이는 '간음'과 관련된 내용을 글의 곳곳에서 보여주면서 그것이 진정 절대적인 죄악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하기도 한다. 사랑이 담긴 남녀 간의 육체적인 관계는 조건으로 만나 사무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부부관계보다는 그래도 나은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톨릭 신자 도마 안중근은 1910년 하얼빈역에서 한일합병의 주역 이토오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는데 당시 천주교는 친일 성향이 있어 처음엔 안중근을 살인자로 단정하며 말도 꺼내지 않다가 해방이 되고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군인 신분으로 적장을 사살했다고 해석을 달리 하기도 했다. 살인이 악한 행위로써 큰 죄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훨씬 악한 행위를 하고도 정당화하는 사람에 대해 양심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은 단순 살인과 다른 의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선악에 대한 고정화된 시각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았다. 악인이 회개하여 선인이 되고 선인이 죄를 짓고 악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교회에 안 나가는 사람은 행동이 더 성서적일지라도 악인이고 형식적으로 교회에 나가면서 행실이 나쁜 사람은 착한 것인가?


성서에 나오는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죽을 뻔한 한 여성은 당시 유대법상 여성은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점을 고려할 때 돈을 주고 성을 즐기려 했던 남성과 달리 생존을 위해 육체를 내놓았던 걸로 보인다. 또한 현장에 남자는 보이지도 않고 약자인 여자만 나온다. 현재 교회도 2천 년 전 바리세이나 율법학자 등 강자에 맞서 소외계층의 편이 되어 주다 처형을 당한 예수님이 보여주신 정의와 사랑보다 강자 곁에서 비위나 맞추며 편안한 길을 가려하는 건 아닌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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