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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를 기억하며

by 최봉기

1975. 8.17일은 장준하가 향년 56세로 포천 약사봉에서 운명한 날이다. 사인이 실족사로 발표됐지만 시신이 깨끗하고 출혈이 없었던 걸로 보아 누군가 둔기로 머리를 쳐서 이미 사망케 한 후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뜨린 게 거의 확실하다('KBS 역사저널 그날' 참고). 지금까지 장준하의 사망은 과거 정권의 미청산된 이해관계 때문인지 의문사로 계속 남아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장준하와 같은 인물은 찾아보기가 무척 어렵다. 그는 자신에게 미칠 어떤 보복 혹은 불이익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에 맨몸으로 끝까지 맞선 인물이다. 절대 권력자 박정희에게 그는 매우 부담스러운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박정희가 일본 천황에 충성을 맹세하며 만주 군관학교를 나온 일본군 장교였다면 장준하는 강제 징집된 일본군 부대를 탈령하여 임시정부에서 광복군 장교가 된 독립운동가요 인권운동가였다.


장준하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가서 학병으로 중국 전선에 갔다가 목숨을 걸고 탈령하여 6 천리길을 걸어 중경의 임시정부에서 미군으로부터 OSS훈련을 받고 특수공작 독수리 작전의 일원으로 국내에 침투할 예정이었지만 일본의 갑작스러운 패망으로 꿈은 무산되었다. 장준하는 1953년 '사상계'를 창간하며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했고 1966년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투옥, 1967년 옥중 당선되어 야당 의원으로 정치활동을 하다 1974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15년형 선고를 받고 가석방된 후 10여 차례씩 투옥된 전력이 있다.


현실주의자가 보기에 장준하는 미련한 인물로 보일지도 모른다. 절대권력과 정면충돌하는 우직함 대신 다소 유연함을 보였다면 가시밭과 같은 길은 피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사상계가 잘 운영되어 흑자로 수익이 날 때에도 집에 생활비를 가져오기는 커녕 기부하기 바빴고 나름 명사라 외부강의나 결혼식 주례 등으로 돈이 생겨도 그 돈을 어려운 이웃에게 주었던 무능하기 짝이 없는 가장이었다. 집에는 빚쟁이들이 기거하며 꾸어준 돈을 갚으라고 난리를 치는 통에 가족들에게 미안함을 가졌지만 자신의 뜻을 굽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 때문에 가족은 많은 불이익을 받았고 장준하 본인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결코 현실과 타협하는 일은 없었다.


그가 야당 의원 시절 국방위에 있으면서 채명신 파월 한국군 사령관을 베트남에서 만나 거듭된 시정요구에도 이루어지지 않던 사병의 처우개선을 그가 해결했을 때 군 내부에서도 그의 소신과 신념에 대해 존경을 보인 군지휘관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를 존경했던 채명신 장군의 말에 의하면 그가 일찍 별세하지 않았다면 DJ보다 먼저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가 군대 조직을 포함 전술과 작전 등에 대해 언급했던 내용을 보면 심도가 있고 날카로운 식견을 보여줬다고 한다.


사실 재야에서는 그가 의문사를 당하던 바로 다음날이 8월 거사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학생들만으로는 유신체제의 종식을 가져오기 힘들다고 봤으며 거사일 전에 재야인사를 포함해 군 장성급 인사까지 물밑 접촉을 가졌다고 한다. 김재규와는 적대적 관계로 만났을 법하였건만 최근 장준하와 거사를 함께 도모한 동지였다는 주장이 나와 주목받기도 했다. 김재규는 10.26 이전에 한차례 박정희를 시해하려 하다 다음으로 미뤘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할지 모른다. 1975년 8월 장준하의 행방은 정보기관에 의해 면밀히 추적되며 보고되던 중 의문사가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반유신 운동의 구심점이 없어지며 유신체제를 견제할 세력이 허무하게도 사라져 버리게 된 것이다.


어둠 속의 횃불과도 같던 장준하가 눈을 감은 지도 50여 년이 가까워진다. 나의 부친은 장준하 선생을 무척 존경하였으며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사상계 잡지가 꽤 많았다. 그 잡지에 함석헌과 안병욱과 같은 지식인의 글이 자주 실렸던 기억이 난다.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이 되었지만 정국이 혼란스러웠고 그 와중에 여러 독재자들이 정권을 잡고 총과 주먹을 휘둘렀다. 이에 대항하여 정의를 부르짖던 이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때로는 죄수가 되기도 했다. 장준하 선생은 일제 이후 이승만, 박정희에 이르기까지 늘 일관된 자세로 불의에 저항해온 애국시민이었다는 말로 글을 매듭짓는다. 또한 그의 억울한 죽음을 둘러싼 억지와 가증스러움의 먹구름이 걷히고 밝은 빛이 비취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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