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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과 풍자

소설 B사감과 러브레터

by 최봉기

내가 현진건 원작 'B사감과 러브레터'란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생이 되던 해 KBS 'TV문학관'을 통해서로 기억된다. 그때 나 자신은 그 작품의 중심인물인 기숙사 생활을 했던 소녀들과 비슷한 나이였으니 내 나이에 맞는 작품을 감상했다는 생각이 든다. 'B사감과 러브레터'는 자유연애의 바람이 일던 일제강점기 조선의 상황을 반영한 소설로 살아계신 1932년생 나의 부친이 세상에 나오기 전 또한 고인이 되신 1911년생 외조부가 10대였던 1925년 2월에 발표되었다.


C여학교 교원 겸 기숙사 B사감은 40대 초반에 아직 미혼으로 '딱장대'(성질이 사납고 딱딱한 사람)에 찰진 독신주의자, '야소꾼'(교회 다니는 사람을 비하하는 말, 예수쟁이)로 얼굴은 주근깨 투성이에 처녀다운 데라곤 없고 시들고 거칠고 마르고 누렇게 뜬 품이 곰팡 슬은 굴비로 표현된다. 뾰족한 입을 앙다물고 돋보기 너머로 쌀쌀한 눈이 노릴 때엔 기숙사생들이 오싹하고 몸서리 치리만큼 엄격하고 매서운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연애편지였다. 더러는 알지도 못하는 남학생이 자신을 수신인으로 해서 보낸 편지까지 사감은 역정을 내며 바른대로 고하지 않으면 퇴학 운운하니 억울해하는 여학생도 있었다. 그러던 중 깊은 밤마다 깔깔대는 웃음과 속살하는 말이 들려온다. 처음엔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누군가가 잠꼬대하는 소리로 생각했지만 매일 반복되다 보니 의아해하다 어느 날 한방을 쓰던 여학생 셋이 함께 그 소리를 듣고 진원지를 향했는데 그곳이 B사감의 방이었다. B사감은 혼자 무아지경에 빠져 배달된 연애편지로 1인 2역 모노드라마를 찍고 있던 것이었다. 목격자 3인은 평소 엄했던 사감의 모습에 어이없어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이유 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듯 보였던 사감도 결국 사랑을 그리워하는 평범한 인간이자 여자였다. 위선적인 그녀는 사실 자신의 속내를 감추기 위해 타인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와 남자들로부터 비호감, 이로 인한 노처녀란 사실에 늘 열등감을 간직한 채 여성에게 접근하는 남자를 마귀라고까지 하며 러브레터를 받은 여학생을 문초한 후 꿇어 기도까지 하는 결벽주의자였다.


100년 전 세상에 나온 소설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능이란 건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10대 때에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심이 무척 강한데 그걸 권위와 엄한 규율만으로 통제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을지 모른다. 특히 독신주의자란 사람들은 어떤 동기에서 가정을 가지려 하지 않는지 모르지만 가정을 가지고 자녀를 키워본 사람의 입장에서는 반쪽 인생을 사는 것으로 밖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학생들 앞에서 카리스마와 신앙화된 굳은 소신을 보여왔던 사감이 늦은 밤 마치 배우처럼 무대 위에서 연애편지 낭송을 하는 모습은 낮시간 동안 감춰진 온갖 욕구의 마그마가 한꺼번에 분출되는 걸로 보인다. 사감은 자신의 외모가 남성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고립적인 성격 때문에 노처녀로 사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개탄과 열등의식을 여성에 접근하는 남성을 마귀로 또한 남성과의 교제를 죄악으로 규정하며 극복하려 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지켜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억지와 독단만으로 또한 왜곡된 권위나 위선만으로는 버틸 수 없음을 'B사감과 러브레터'는 적나라하게 풍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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