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아버지랑 함께 외식을 할 때 가장 맛있게 먹었던 메뉴가 있다. 당시엔 갈비나 생선초밥 같은 고급 음식은 꿈도 못 꾸었고 중국집에서도 탕수육과 같은 요리는 지금과 같이 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어 단골로 먹었던 게 '짜장면'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모락모락 김이 나는 면위에 시커먼 짜장이 올라가 있는 짜장면의 냄새와 맛은 늘 한결같이 코와 입을 자극하였고 언제나 먹어도 질리는 일이 없다. 게다가 가격도 저렴하여 서민들이 즐겨먹는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여기저기 중국집이 많았지만 아직도 내가 맛을 잊지 못하는 곳이 부산 부평동의 국제시장 입구에 있던 '옥생관'이었다. 그 집은 주문을 하면 음식이 빨리 나왔고 그 집주인은 뛰어다니면서 주방의 요리사들을 조인트까지 차면서 닦달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당시 중국집에서 간혹 짜장면과 같이 먹던 군만두의 맛이 또한 일품이었는데 요즈음은 그러한 만두를 먹기가 거의 어려워진다. 최근 삼각지역 부근 '명화원'이란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집에서 잊힌 과거의 군만두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중국집은 맛이 좋아 문을 열자마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중국 본토에서 살던 화교들은 19세기 말 임오군란 후 청나라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 3천 명과 상인 40명을 보내며 조선으로 온 것이 시초이며 청국 상인의 입국이 공식화되면서 1894년 '청상 보호 규칙'이 제정되었고 이때부터 화교들의 정착이 시작되었다. 화교들 중 알려진 인물로는 화교 학교 선후배인 가수 진미령과 주현미가 있고 탤런트 중에는 하희라가 있다.
한국에서 중국집을 하다 돈을 번 화교들 중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미국 애틀랜타에 있을 때 '평호'라는 중국집이 있었는데 인천에서 중국집을 하던 화교들이었다. 그 집은
한국 손님들에게는 김치를 내어주기도 하였다. 화교들 중 중국집을 운영하여 문을 닫았다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그 비결은 변치 않는 맛과 한결같은 서비스 정신이라 생각한다. 비가 오는 날에도 주문을 하면 연로한 주인이 쇠로 된 통을 들고 직접 배달을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아마 지금도 화교 2,3세들이 운영하는 중국집들이 곳곳에 있으리라 본다. 몇 년 전 과거의 맛을 찾아서 부산역 건너편 차이나타운에 있는 중국집을 간 적이 있었는데 혹시나 하던 게 역시 나로 바뀌었다. 그리고 과거 옥생관에서 길 건너 보수동에 있는 '옥성 반점'이란 곳 음식이 맛있다고 하여 가봤는데 거기서도 과거의 맛을 느낄 수는 없었다. 어떤 이들은 우리의 입이 과거 40년 전보다는 워낙 고급화가 되어 그렇다고도 하지만 나의 마음은 늘 나훈아의 머나먼 고향의 가사처럼 짜장면 맛을 찾아 "마음은♪ 고향(옥생관) 하늘을 ♬날아갑니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