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논픽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게 실제 발생한 일로 하루하루 기록되며 지나간다. 만일 현재의 상황이 픽션이라면 어떨까? 가령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따로 있다든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현재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재가를 해서 만난 분이라든지 등등. 지인 중에서는 이와 비슷한 경우가 실제로 존재한다. 나의 친구가 20대 때 교제했던 한 여성은 생모가 장애인이었다는데 어릴 때부터 이모댁에서 키워지며 이모를 엄마로 알고 자랐다는 것이다. 무척 슬픈 라이프 스토리가 이닐 수 없다.
또 하나의 지인은 자신이 아기 때 생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부친이 생모와 동향인 수원 출신으로 생모의 모교였던 명문 경기여고의 후배인 새엄마와 재혼을 했다고 한다. 흔치 않은 인연일지 모른다. 그리고는 새엄마가 자기를 돌보며 일부러 동생은 낳지 않았다고 한다. 어찌 보면 그 친구의 생모와 새엄마는 전생에서 언니 동생 사이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까지 든다.
박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은 TV에서 '허준'이란 드라마로 방영되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원작에 나오는 허준의 스승 유의태는 허구적인 인물이라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御醫 허준은 '東醫寶鑑'이란 의서를 집필한 인물이란 사실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게 없건만 그의 생애를 그렇게 소상히 그것도 그럴듯하게 당시의 시대상황에 맞도록 픽션화한 걸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만약 내가 소설가였다면 어땠을까? 아직도 소설이란 장르는 무척 생소하고 어려워 보이긴 하지만 나름의 스토리를 가지고 삶의 요모조모를 파헤쳐보면 꽤 흥미로울 것 같다. 그전부터 한번 써볼까 했던 스토리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제목의 소설이다.
그 소설에는 20대 중반 이전의 청춘남녀가 등장하는데 여자 경험이 많지 않은 한 남자는 나름 준수한 외모에 지적 매력과 언변에 패기도 있지만 사고가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비현실성을 벗어나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스스로 자부하며 더욱 이상적으로 되어가기만 한다. 반면 여자는 남자들이 보기만 하면 호감이 생길 정도의 미모에 청순하고 理智的인 느낌도 주지만 생각보다 현실적이고 속으로 들어가면 겉모습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냉정함과 慓毒스러움을 가지고 있다.
두 남녀는 캠퍼스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그 남자는 어느 순간 그녀가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인 여성이란 착각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는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가 산적하다. 그것은 병역문제와 생각만큼 만만치 않던 대학원과정 공부였다. 반면 그녀는 그에게 호감은 가지만 현실적인 안정감을 느끼지 못한 채 처음엔 그를 피하려고만 한다. 그 후 간간이 만났을 때에도 그의 안정되지 않은 현실적 상황 속에서 비치던 불안감 내지 초조함을 그녀는 의구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기만 하는데 한 번은 그를 향해 가슴속에 쌓여있던 불만들을 마구 거칠게 쏟아내기도 하며 신경질을 낸다.
그리고는 흰 눈이 내리는 날 그가 사랑하는 맘을 담아서 쓴 편지를 그녀에게 보내는데 돌아온 답장은 "아니요"였다. 상심한 그는 그녀에게 더 이상 마음을 두지 않고 지내는데 날이 더위질 때나 되어 우편함 속에서 그녀가 보낸 편지를 하나 발견한다. 과거 집요하게 오던 편지도 끊기고 바쁜 일상 속에서 그를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는 기쁨 반 얼떨떨함 반으로 편지를 대하며 정리되지 않은 마음속에서 번민하게 된다. 그에게는 하던 대학원 공부의 부진함과 군복무의 무거운 짐이 계속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번민 중에 그녀에게 최후통첩이라 할 편지를 보낸다. 그녀는 남자의 현실 상황이 호전되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지만 받아본 편지에 적힌 학업 관련 어려움과 병역 관련 고충을 접하며 그에게서 온 확인전화에 편지 같은 걸 받은 적 없다고 잡아떼고는 빈정대는듯한 말 몇 마디를 던지고는 끊어버린다. 그리고는 전화번호를 바꿔버리고 그 남자에게서 차갑게 등을 돌린다.
그 후 그녀는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는 친구 언니 소개로 만난 의사와 결혼한다. 그녀는 자신이 희구하는 대로 현실적인 안정감속에서 무지갯빛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한편 그녀가 등을 돌린 남자는 몇 년간 배반감에서 오는 정신적 좌절감과 안정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지만 이를 악물고 학업을 끝내고 늦게나마 군복무까지 마치게 된다. 그가 어려움을 겪던 몇 년의 기간 동안 그녀는 임신만 하면 이유를 알 수 없는 유산을 계속 거듭하게 된다. 그는 이제 현실적으로 안정을 찾게 된다. 취업도 하고 결혼도 한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누군가로부터 그녀의 소식을 접한다. 자신이 힘든 나날을 보낼 때 계속 유산만 하며 똑같이 힘든 나날을 보내던 그녀가 그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시간을 마치 서로 맞춰놓기라도 한 듯 남자가 고통의 땀을 흘렸을 때 여자는 유산을 하며 똑같이 현실 속에서 신음을 했고 남자가 현실적으로 안정을 찾자 여자도 애타게 그리던 애를 갖게 되며 물아래로 침수된 삶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도 그녀는 과부인 시어머니와 함께 살며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게 된다. 과부 시어머니의 눈에 보이는 며느리는 자신이 고생해 키워 의사로 만든 외아들을 보고 군침을 흘리며 집안에 들어와 아들이 번돈으로 외제차에 값비싼 옷으로 호강만 즐길 줄 아는 여자였다. 이에 심사가 편할리 없는 시어머니는 사사건건 간섭과 사그라들지 않는 집요한 쏘아붙임으로 집안은 편할 날이 없다.
이상의 스토리로 볼 때 인생은 어찌 보면 험난한 현실 속에서 '안정된 삶'과 '진실 추구'란 다소 상반된 목표 속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현실을 추구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인간적인 존중이 늘 필요한 것이다.
현실적인 安慰에 양심과 영혼을 내팽개치고 육체를 던진 한 여성은 결국 또 하나의 새로운 현실의 벽속에 갇힌다. 그래도 그녀는 매달 통장으로 들어오는 현금이 삶의 고뇌와 공허함을 말끔히 씻어주고 영혼까지 구원할지 모르는 靈藥이란 현대판 신앙을 간직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