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살다가 한국전쟁 전후에 많은 사람이 월남하였고 최근에는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정착해 살고 있다. 한국전쟁 때 피난 내려온 인구는 남북 적십자사 추계로 보면 약 100만 명에 이르고 과거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이던 탈북자가 2000년이 지나면서 매년 천여 명 이상으로 늘었다. 현재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조선족들이 많은데 그들의 말씨가 함경도 억양이라 혹시 탈북자가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탈북자들은 사회적응 교육시설인 '하나원'에서 3개월간 적응교육을 받고 1인 기준 800만 원에 주거지원금 1,600만 원까지 최대 총 2,400만 원을 지원받지만 그 정도의 돈으로 체제나 사는 방식이전혀 다른 남쪽에서 살아나가기는 호락호락하지 않으리라 보인다. 과거 탈북한 인민가수 '김용'은 '모란각'이란 이름으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며 번창했지만 2000년 들어 96개의 사업장을 정리하고 2개만 남은 걸로 알려졌다.
나의 부친은 함경도에서 태어나셨는데 입대한 후 6개월 후 한국전쟁이 발발해 졸지에 전쟁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3년 반을 보냈다. 하지만 마치 로또에 당첨이라도 된 듯 수용소 출입관리를 맡은 민간인의 도움으로 피난 내려온 삼촌들과 할아버지를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휴전 시 포로에게 주어졌던 선택 즉 '북한'이나 '제3 국'이 아닌 연고도 없는 '남한'에 정착하며 70여 년간 타향살이를 하고 계신다. 부친은 2000년 초 이산가족 상봉 때 금강산에서 이북에 사는 손아래 친척을 만났는데 가장 보고 싶어 했던 막내 삼촌은 몇 년 전에 고인이 되었다는 비보를 접하기도 했다. 이북의 친지들은 부친이 한국전쟁 때 사망한 걸로 알았다고 한다.
이북에서 내려와 정착했던 분들 중에는 이북에 배우자와 자녀를 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분단이 고착화되자 남한에서 다들 재혼을 했다. 부친의 삼촌들도 배우자와 자녀를 두고 월남했는데 당시에는 금방 돌아올 걸로 판단했다고 한다. 당시 부친의 작은 숙모는 어린 자녀를 안고 같이 배에 타려 했다는데 증조부가 돌려보냈다고 한다. 증조부는 그 일을 두고두고 무척이나 미안하고도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고 한다.
만일 내가 월남했다면 어땠을까?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지내려면 가장 현실적으로 시급한 문제가 먹고사는 일이다. 맨몸으로 생존을 하는 데 필요한 건 뭐니 해도 '머니'이다. 그러려면 일자리가 있어야 하는데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지기 위해서는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월남한 사람들도 악착같이 공부해 대학에 입학해 苦學을 하게 된다. 이 경우에도 만일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다면 대학진학은 말할 것도 없고 어렵게 입학해도 생존을 위해 중퇴할 수밖에 없다.
휴전 후 20대 초반 남쪽에 정착한 나의 부친은 무척 운이 좋은 분이었다. 파리 목숨이라는 전쟁에서도 포병이었기에 살아남았고 생존해서 포로가 되었음에도 월남한 가족을 만나 경제적인 도움까지 받으며 무사히 대학을 마치고 전문직인 藥士가 되었기에 그러하다. 전쟁포로 출신은 대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생활을 하였다. 부산 국제시장 등에서 노점상이라도 해서 돈을 몇 푼 모으면 매장을 얻어 장사를 하고 돈이 모아지면 매장을 늘리는 것이다. 전쟁포로 출신 중에서 전문직이 된 경우는 부친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 덕분에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로 유학을 했고 미국에서 대학원까지 마칠 수 있었다.
부친이 실향민이라 나는 실향민이 타지에서 살며 겪는 고충과 고뇌에 찬 인생역정을 늘 곁에서 지켜보며 살았고 정권별로 남북관계 관련 정책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실향민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별 배경 없이 맨몸 하나로 살다 보니 자립심이 무척 강하고 매우 검소하다. 말을 좀 거칠게 하면 '인정이라고는 없는 구두쇠'로서 한마디로 '코리언 유태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상도 출신인 모친은 부친의 그런 점을 무척 못마땅해 했다.
한때 나도 부친의 지나친 근검절약 태도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돈을 못 쓰게 하고 혹여나 밖에서 친구들과 술을 먹고 들어오면 낭비벽이 있다고 꾸짖는 부친에게 "당장 밥을 굶을 형편도 아닌데 그렇게 짜게 살 필요가 있나요?"하고 대들기도 했다.
그 후 나도 나이를 먹고 가장을 책임지는 위치가 되면서는 부친을 이해하게 되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맨몸으로 내려와 생존의 위협까지 경험했던 부친과 같은 분에게 '구두쇠'라고 욕했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건만 부친의 항변은 당신이 힘들 때 도움을 주는 사람은 주변 어디를 찾아봐도 없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안간이 사는 세상에는 온정이란 게 있는 법이다. 대학시절 부친이 점심을 매일 굶고 지낼 때 같은 과의 한 동기분이 "최형! 내가 오늘 가정교사 월급을 받는데 같이 중국요리 한번 먹으러 갑시다"라고 던진 말에 가슴속 깊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다들 밥도 제대로 못 먹던 시절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 힘든데도 남에게 베푸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무척 대단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부친은 대학졸업 후 가정을 가진 후에도 그분과는 무척 가깝게 지냈고 그분이라면 힘들 때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구순을 넘긴 부친은 당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북에 있었다면 지금보다 삶이 별 낫지 않았을 거라고 하신다. 나는 부친께서 인생초반에는 고생을 많이 하셨지만 그 후 轉禍爲福의 삶을 사셨다고 말하곤 한다. 현재 탈북해서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홀홀단신으로 어렵게 지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을 것이다. 그들도 공평한 기회를 누리며 희망찬 미래를 꿈꾸길 손 모아 빌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