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현실이 무척 혐오스러워진다면?

by 최봉기

가정이 있는 사람이 일상적인 삶을 살다가 뜻밖의 일을 경험하면서 사고와 삶의 틀 자체가 극단적으로 변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일제강점기이던 1914년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나와 한국인 최초로 판사가 된 인물이 있다. 그의 이름은 '이찬형'인데 불교계에서 효봉스님(1888~1966)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재판정에서 살인한 사람을 사형으로 형을 확정했는데 그 죄수는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을 살해했던 조선인이었다. 비록 살인을 저지른 중범죄자였지만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의연했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 길에서 엿을 파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다. 엿을 몽땅 사 줄 테니 엿장사하는 걸 가르쳐 달라고 묻고는 그 순간부터 법복을 벗고 가족과도 소식을 끊은 채 입고 있던 양복과 구두를 팔아서 엿장수가 된다. 그때부터 3년간 전국 각지를 떠돌며 엿장수로 살다가 금강산의 신계사로 들어가 승려가 된다.


효봉은 원래 평안도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신동소리를 들으며 사서삼경에 정통했으며 당시 수재들만 진학하는 명문 평양고보를 졸업하였다. 그 후 조선인을 위해 일하겠다는 마음으로 고시를 통과해 판사가 되어 10여 년간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판사생활을 하였다. 그는 현실적으로 누구나 우러러보는 위치에 있었고 능력과 기품을 뽐내며 지냈지만 한순간 자신이 추구하던 가치관이 무너지며 세상 보는 눈이 180도 바뀌게 된 것이다.


만일 나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면 어땠을까? 인간은 누구나 현실 속에서 추구하는 가치체계의 기초 위에서 생활을 해나간다. 학교 때 누구나 놀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대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런 세속적인 삶의 행복이란 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 인기 학과를 나와 전문직이 되면 나이가 서른 정도 된다. 그때 안정적인 가정에서 잘 교육받은 여성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강남의 학군에 보내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흔히 말하는 성공의 모델이다. 이러한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의미가 한순간 무너지게 된다면 또한 어찌 될지 무척 궁금해진다.


효봉은 속세를 등지고 엿장수가 되었으며 결국 불교에 귀의하였다. 현대판 효봉은 어떤 모습이 될 수 있을까? 현실의 가치에 회의를 느낄 때 어떤 사람은 스스로 삶을 정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좀 더 생산적인 대안을 찾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대판 엿장수로 대중음악이나 벤처사업 혹은 전위예술 등을 떠올려 본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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