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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가 백수였다면?

by 최봉기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 백수"라고 한다. 백수가 들으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얘기이다. 세상에서 애초부터 백수가 되려고 작정한 사람은 없다. 백수들은 살다 보니 백수가 되어버렸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하지만 잠시라면 몰라도 평생 백수로 사는 건 본인이나 사회에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백수'란 말은 원래 놀고먹는 사람이란 의미인데 현재는 '무직자'를 통칭하는 말이다. IMF 외환위기 때에는 슬프게도 많은 청년 대졸 백수들이 양산되기도 했다.


나는 백수는 아니지만 백수란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평생을 살며 백수 근처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도 분명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리를 잡기 전에 잠시 백수경험을 해보는 건 삶의 이해란 측면에서 나름 의미는 있어 보인다.


어떻게 하면 백수가 되는 걸까? 우선 무능해서 백수가 되는 경우가 있다. 학교 때 공부를 못해 명문대학 혹은 인기학과를 갈 능력도 없고 쓸만한 자격증도 없이 무직으로 주구장창 사는 경우이다. 공부를 싫어했거나 못했어도 문방구나 구멍가게와 같은 자영업을 한다면 백수신세는 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백수로 평생을 지내는 사람은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걸까? 아마 허황된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인지 모른다. "나도 왕년에 남 앞에서 고개를 숙여본 적이 없었는데 남들이 비웃는 일까지 하며 사느니 차라리 집에서 조용히 지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반면 능력은 있지만 백수가 되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고시낭인'을 들 수 있다. 고시에 1차는 합격하지만 2차에서 크지 않은 점수 차이로 계속 낙방하는 경우이다. 그런 식으로 세월을 보낼 경우 취업이나 결혼과 멀어지고 계속 제자리걸음만 하게 된다. 만일 고시의 꿈을 빨리 접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박사학위라도 취득했다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으련만 고시에만 목을 매다가 결국은 백수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눈높이를 낮추면 백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든다.


IMF 외환위기 때에는 구조조정 한파로 다니던 직장에서 나와 실직자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갑자기 다니던 직장에서 나와 백수가 된 어떤 가장은 여자가 밖에서 일을 할 때 집에서 어린 자녀를 양육하면서 헌 책방을 다니며 에로소설 읽는 걸 낙으로 삼는데 여자는 퇴근해서 집에 오면 늘 남편에게 무능한 남자라고 면박을 준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여자가 집 부근에서 술이 취해 자신이 운영하는 영어학원의 남자강사랑 애정행각을 벌이는 걸 목격하고 심한 배신감과 모욕감에 사로잡혀 결국 여자를 살해하게 된다. 이상은 영화 '해피엔드'의 줄거리이다.


만일 내가 백수였다면 어땠을까? 은퇴한 지금도 대단한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가족과 떨어져 생활비의 일부는 버는 정도의 일을 한다. 만일 아무 생각 없이 집에서 빈둥빈둥 놀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생활을 한다면 우선 여자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 스트레스를 키울 것 같다. 따라서 가족과 떨어져 일하며 지내다 주 1~2회씩 집을 들리는데 시간 될 때마다 혼자 에세이라도 한편씩 쓰며 살고 있다. 그렇게 2년간 쓴 글이 총 417편에 달한다. 얼마 전 누굴 만났을 때 "나는 유언할 걸 이미 글로 다 써 놨으니 내일 눈을 감아도 별 아쉬울 건 없네요"란 말을 하기도 했다.


서두에서 나는 백수를 이해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했다. 그 이유는 나에게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할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20대 때 미국에 유학을 가서 남들이 후딱 마치는 대학원 과정에서 공부가 늦어져 사면초가 내지 진퇴양난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마치 늪에 빠진듯한 생활 속에서 존재감도 상실한 채 정신적인 방황의 여진이 몸과 마음을 어지럽게 하기만 했다. 당시에 그리된 원인은 사고 자체가 현실과 너무 괴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지금 만일 주변에서 그런 식의 정신적인 방황을 하는 누군가를 본다면 함께 대화하고 고민하거나 과거 나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고 싶기도 하다.


인간이 생존하는 데 있어 가장 치명적인 것은 공기이고 그 다음이 빵이다. 암만 곳간에 곡식이 많더라도 공기가 없으면 질식하는 게 인간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공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빵이다. 공기의 고마움을 가슴속 깊이 음미하며 빵의 가치를 그 아래에 두는 사람이 혹 백수인 건 아닌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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