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河小說이란 인간의 삶을 사회적 배경 속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포괄적으로 다루는 소설이다. 박경리의 '토지',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닥터 지바고'와 같은 작품이 그러하다. '여로', '야망의 세월', '허준' 등의 TV드라마는 파격적인 시청률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는데 원작은 모두 대하소설이다. '여로'의 방영시간에는 도로에 통행하는 차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작품이 큰 반향을 일으키는 이유는 스토리의 일부분이 마치 자신들의 얘기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많은데 그중 가장 소름 끼치는 게 전쟁일 것이다. 그밖에 쿠데타등 정변과 함께 오일쇼크, IMF사태 등 경제위기와 올림픽, 월드컵 등 스포츠행사들까지 크든 작든 삶에 영향을 미친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는 한국전쟁 때 월남한 가족이 겪는 어려움이 파독 광부와 베트남 파병으로 이어졌으며 이산가족 찾기 등 민족사의 애환이 서려있는 사건들이 재조명되며 관람객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이토록 현재와 같은 축복받은 삶의 뒤편에는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늘 숙연함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만일 내가 대하소설을 쓴다면 어떨까? 우선 내가 경험했던 굵직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그러한 일들과 관련한 나의 개인적인 기억을 총동원해야 할 것이다. 나는 1964년생인데 태어난 해에 크게 히트를 친 영화가 대한민국 영화사에 길이 남는 걸작 '맨발의 청춘'이다. 나의 부친은 함경남도 이원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인민군 포병으로 징집되었고 전쟁 중 부대를 이탈하여 포로신세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3년 반 忍苦의 시간을 보내셨다. 포로시절 운 좋게도 월남했던 가족 몇 분과 극적으로 상봉하게 되어 포로교환 시 북이나 제3 국이 아닌 남한을 택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藥大를 나와 전문직으로 지금과 같은 안정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5세이던 1968년에는 청와대 근처까지 공비가 침투했던 1.21 사태와 울진삼척 공비사건 등이 연이어 터지며 남북간 긴장이 크게 고조되었다. 하지만 그 후 내가 초등학교 2학년때인 1971년에는 남북적십자회담이 성사되더니 다음 해엔 전쟁으로 철천지 원수가 된 미국과 중국 간에 대화의 무드가 조성되며 드디어 탈냉전시대로 돌입했다.
그리고 내가 고1이던 1979년에는 유신헌법으로 종신집권을 노리던 권력자가 시해되며 3 공화국이 막을 내렸다. 그다음 해에는 모처럼 '서울의 봄'이 오나 싶더니 광주에서 대학살극이 벌어졌고 1981년 3 공의 연장선에서 부도덕한 5 공화국이 출범하며 3S(Sex, Sports, Screen)와 같은 지저분한 정책으로 온 국민을 기만하며 국가발전을 후퇴시켰다.
내가 1982년 대학에 진학한 다음 해에는 KAL기 격추와 버마 랭군사태 등 예측불가한 사건이 터졌고 1985년에는 미문화원 점거사건이 발생하며 당시 정당성 없이 무력과 압제로 권력을 마구 휘두르던 정권을 위기로 몰고 갔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때에는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고 호헌을 선언한 5공 전두환정권에 맞서 전 국민이 거리로 나서며 극도의 혼란상황이 펼쳐졌고 자구지책으로 6.29 선언이 나오며 직선제를 통해 5 공의 연장인 6공이 시작된다. 그 후 3당 합당 꼼수로 문민정권이 출범했지만 IMF사태를 초래하며 직장인들이 대거 실직자로 전락했다.
그리고 김대중정부가 출범하며 경제는 다시 안정을 되찾게 된다.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과거에 들어보지도 못했던 '햇볕정책'이란 걸 통해 북한과 가까워지는 노력을 하며 통일을 앞당긴 듯싶더니 결국은 핵무기개발 지원을 통해 남북간 정상적인 대화를 경색시키기도 하였다. 이제는 글로벌화된 경제환경 속에서 미래의 시장 주도권을 놓고 국가 간 무한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이상의 내용은 내가 태어날 당시 휴전 후 남북대치 상황하에서 가난에 찌들고 정치적 압제가 심했던 대한민국이 경제적 발전과 정치적 민주화를 통해 현재와 같은 선진국에 도달한 과정을 요약한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생활수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의미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눈부신 경제발전 이면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생활수준은 분명 나아졌지만 현재 사회구성원 간 소통 부재로 인해 계층 및 세대 간 갈등이 갈수록 심화되며 독선과 이기주의가 만연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돈이면 최고이고 나만 잘되면 된다는 독단과 함께 이를 합리화하는 사회분위기로 원인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먹고살기 힘든 시대는 일단 지났다. 지금은 기본생활의 안정 속에서 인간의 존재와 함께 개성이 존중받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절실한 때이다. 다시 말해 돈의 위력 속에서 인간의 가치가 무시되고 몰개성화 및 획일화되는 세태 속에서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드는데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할 때이다.
이러한 메시지를 담은 대하소설을 언제일지 모르지만 내 손으로 집필해 볼 생각이다. 내용은 차체하고 우선 제목을 나름 거창하게 만들어 본다. '껍데기를 부수고 더 나은 곳을 향해'라고 한다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