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가르친다. 성경구절 중에서 가장 실행하기 어려운 게 이 구절이 아닐까 싶다. 자신에게 큰 상처나 피해를 준 사람이 잘못을 뉘우친 경우에도 쉽지 않은 게 용서인데 뉘우치지도 않는데 용서하기는 더 더욱이나 어렵다. 마찬가지로 한일관계에서도 일본이 과거 남의 나라를 불법으로 강탈하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자신들의 잘못을 통절하게 반성하기보다 합병은 조선이 원한 것이었으며 자신들은 미개하고 국가운영 능력도 없던 조선을 근대화시켜 주었다고 극구 우긴다면 독립을 외치다 투옥되거나 고문당한 이들이 저 세상에 간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이라도 일본을 용서하고 사랑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상처나 피해를 주었음에도 반성은커녕 과거의 일을 구차하게 덮기만 하고 합리화하기 급급한 인간이라면 욕설이라도 내뱉고 기싸데기라도 때리고 싶은 심정이 되는 건 비정상적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런 사람에게 "나는 너를 용서했다"는 말이 나올까? 만일 그렇다면 이는 마음에 聖靈이 임했거나 혹은 며칠 후면 세상을 떠날 운명이라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경우 일지 모른다. 아니면 기억상실증에 걸렸거나 僞善者일 경우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반성하는 마음도 없는 이에게 선뜻 용서한다고 할 경우 상대방은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기는커녕 과거의 恥部를 땅속에 묻어버리고 비슷한 짓을 또 저지를지도 모른다. 따라서 잘못을 저지른 인간이 改過遷善이라도 하게 만들려면 지나간 일이니 덮어버리기보다는 잘못을 따끔하게 지적해 줄 필요가 있다.
이와는 달리 만일 굶은 사람이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내뺀 경우라면 훗날 형편이 나아질 때 찾아와서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고 지불하지 못한 밥값은 갚으려 하리라 보인다. 이는 고의적 일지는 모르지만 악의가 없는 절도이기에 그러하다. 영화 '변호인'에 그런 장면이 나온다. 가난한 고시준비생이 돼지국밥을 먹고는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갔다가 고시에 합격해 다시 찾아와서 국밥을 먹고는 과거의 것까지 함께 갚으려 하자 국밥집주인은 웃으면서 괜찮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비록 절도에 준하는 일이지만 인간으로서 동정이 간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훔쳐서라도 먹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남에게 돈을 꾼 사람이 사정이 어려워져 갚을 형편이 안 되는 경우는 대개 종적을 감춘다. 뒷간에 갈 때의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른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과거에 한 번은 며칠 후면 갚겠다고 해놓고 돈을 꾸었다가 결국 갚지 않고 달아났던 한 친구를 향해서 거품을 물며 욕을 하자 똑같은 인간에게 똑같은 일을 당했던 한 친구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돈을 갚을 사람인지 안 갚을 사람인지도 몰라?"였다.
사회생활에서 웬만하면 돈거래는 하지 말라고 한다. 그 이유는 만일 돈을 띠일 경우 돈만 잃는 게 아니고 사람도 함께 잃기에 그러하다. 내가 꿔준 돈을 찾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아마 나 말고도 여러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다 잠적했던 인간이 재수 좋게 로또에 당첨된 경우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아마 그럴 경우라도 과거의 지저분했던 자신의 모습은 그냥 덮어버리려 할지 모른다.
위에서 언급했던 주변에서 돈을 마구 꾸었다가 잠적했던 인간은 과거 부유했던 집의 사정이 갑자기 안 좋아지자 형댁에서 기거하며 용돈이 부족하자 여러 친구들에게 며칠후면 갚겠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돈을 마구 꾸어 썼던 모양인데 결국 준사기꾼이 되어 군에 입대한다. 그중에서도 도무지 용납하기 어려운 경우는 친구집에 가서 친구가 없을 때 친구 모친에게 급한 일로 돈이 필요하니 며칠 후 바로 갚겠다고 하고 돈을 꾼 일이다. 한마디로 돈을 손에 넣으려 인간쓰레기짓까지 하는 것이다.
제버릇 남 못 준다고 그는 전역 후 취업을 하여 직장 동료들에게도 돈을 꾸어 갚지 않고 퇴사를 했다고 하며 영어학원을 한다고 여기저기서 수억을 꾸었다가 이 또한 갚지 못할 처지가 되자 이번에는 해외로 도피까지 하였다고 한다.
영화 '남영동 1985'에는 1980년 초 신군부에게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던 한 정치인이 이런 말까지 한다. "고문을 당하던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리니 너무나도 괴롭고 치가 떨려서 사람이 미쳐버릴 지경이었네요. 그래서 결국은 그 고문을 지시했던 인간을 용서할 수밖에 없었네요."
"죄는 미워해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을 이해하거나 실천하려면 아직 좀 더 살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