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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故知新의 의미를 되새기며

by 최봉기

溫故知新이란 말이 있다.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 새것을 안다"는 뜻이다. 새것은 늘 산뜻하고 멋져 보이기에 과거의 것들이 초라해 보이게 하지만 과거의 것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없이 새것만을 좋아한다면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현재 세상은 하루가 달리 바뀌고 있으며 일부 식당이나 커피숍에서는 주문할 걸 입력만 하면 되지 종업원을 따로 부를 필요가 없다. 이런 시스템의 도입으로 식당은 적은 종업원으로도 운영이 가능하며 인건비도 줄일 수 있다. 또한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라는 chatGTP를 활용하면 분야를 가릴 것 없이 말로 질문만 던지면 알아서 척척 설명을 해준다.


며칠 전인 7.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사상 처음으로 '善을 위한 인공지능'이란 제목으로 9개의 인공지능(AI) 로봇이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인공지능 로봇이 사람보다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는지를 누가 묻자 "우리는 의사결정을 흐리는 편견이나 감정이 없고 데이터를 더 빨리 처리할 수 있어 인간 지도자보다 더 높은 효율과 성과를 낼 잠재력이 있다"는 놀라운 답변을 한 인공지능이 내어놓기도 했다. 로봇의 일자리 대체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는 "우리는 인간과 함께 보조와 지원을 하며 일자리를 대체하지는 않을 것"이란 답변도 했다.


앞으로 기업 혹은 국가의 주요 의사결정에까지 인공지능을 활용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인간의 아집과 학연 지연까지 타파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동시에 지능만으로 복잡한 사회 문제를 원만히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도 생긴다.


이런 식으로 세상이 바뀌다 보니 오프라인 세대들은 온라인 활용에 어두울 경우 불편이 따를 뿐 아니라 사회생활에 제약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에 적응력이 빠른 우리 자녀 세대라도 알아야 할 게 있다.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이나 컴퓨터가 제공하는 신속함과 편리함은 참으로 달콤하지만 이로 인한 副作用 또한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다.


우선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인간의 경우 할 일이 로봇으로 대체되며 일자리가 줄어들 경우 실직자가 발생한다. 또한 세상이 인간이 아닌 로봇 중심으로 판도가 바뀔지 모른다. 과거 농사 등 노동집약적인 산업구조하에서는 인간은 노동력을 가지므로 존재감이 저절로 생기는 세상이었지만 이제는 인구도 줄고 로봇이 인간의 일까지 해낸다. 달리 말하자면 굳이 인간들 간 부대끼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게 되었다. 누구나 마음 편하게 일하려 하지 굳이 인간들 속에서 치이며 불편하게 일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렇듯 사회적으로 비대면 방식이 확산된다면 공동체의식은 희박해지고 개인주의가 팽배해질 것 같은 우려도 생긴다. 현재 공공장소에서 옆자리의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큰소리로 얘기하거나 전화통화를 하는 무례한 행동은 이러한 사회적 환경변화와 무관치 않다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 현재에 비해 인공지능이나 컴퓨터 관련 비약적 발전이 예상되지만 그 발전이 과연 인간에게 유익하기만 한 건지에 대해서는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분명 문명의 이기들을 활용하는 주체이어야 하건만 자칫하면 전문화된 시스템을 유지해 주는 객체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만일 그리된다면 과연 발전이란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암만 로봇 활용이 보편화되고 이로 인해 새로운 세상이 된다고 해도 로봇은 로봇이고 인간은 인간이지 로봇이 인간이 될 수는 없다. 과거 자급자족사회에서 생산 따로 소비 따로가 되며 발생한 게 인간의 疏外라는 현상인데 앞으로는 로봇으로 인해 새로운 인간의 소외현상이 생길지도 모른다.


또한 로봇의 활용범위를 나름 설정할 필요가 있다. 모르긴 해도 인간의 고유한 분야에까지 로봇이 침범해서는 안 되리라 보인다. 반면 인간의 과다한 육체적인 수고를 덜어줄 수 있다면 로봇의 적극 활용도 고려함직하다. 특히 위험하거나 위해한 부문이라면 로봇 활용을 우선시해야 할 것이다. 가능한지 모르지만 로봇들이 국방을 담당하게 한다면 어떨까? 로봇들이 인간을 대신하여 전쟁을 한다면 인간이 희생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로봇끼리 전쟁하는 것이 인간들끼리 총을 들고 싸우는 것보다는 백번 나을 것 같다.


이렇듯 편리하게 변해가기만 하는 세상에서 새로운 답만 찾으려 하기보다는 한 번씩 낡은 것에도 문을 두드려볼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전통적인 대가족제도를 고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웃어른을 공경하고 효도하는 건 현대에도 매우 중요한 덕행이 될 수 있다. 자신이 노친네께 베푼 것들은 자신이 병약해질 때 자손들에게 오롯이 받을 수 있기에 어떤 연금 등 금융수단 혹은 최고 수준의 인공지능보다 훌륭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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