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한 전쟁을 겪으며 어려운 시절을 보낸 대한민국 국민들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물리치며 이제 먹고사는 일에 크게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가 되었다. 과거 해마다 보리고개로 주린 배를 움츠리고 지내던 시절 대한민국을 지탱했던 힘은 다름 아닌 처절한 '헝그리 정신'이었다. 배고픔을 참고 샌드백을 치며 현해탄을 건너 세계 타이틀에 도전하여 상대를 통쾌하게 누이고 챔피언이 되어 錦衣還鄕했던 한 복서는 국민 영웅이 되었는데 그 정신으로 이룬 게 '한강의 기적'이다.
고인이 된 대통령 전두환이 1984년 9월 일본 순방 직전 釜關페리호 선상에서 韓日을 대표하던 지식인들이 한일관계에 대해 대화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소설가 최인호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자신이 과거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시위에 참가했던 얘기와 함께 배고픔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그 시절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로 다들 힘들어할 때 일본에서 나온 책들을 보면 인간의 인격과 사랑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배고픔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그런 수준의 사고를 할 수가 없었어요"라고 토로했다. 그밖에 다른 참가자들도 과거 일본의 침략행위를 비난하는 말을 쏟아내자 일본 측 한 참가자는 일본말로 "병신 같은 놈들"이라고 대응하며 분위기가 험악해지기도 했다.
과거 가난했던 시절 인간이 당장 기본생활을 하기도 버거운 상황이라면 남에게 아쉬운 얼굴을 하며 도움을 요청하면 몰라도 남을 배려하고 도움을 줄만한 여유는 갖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여유로워진다고 해서 주변의 그늘진 곳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건 아니다. "있는 놈들이 더 하다"는 말이 있고 차라리 없는 사람들끼리 同病相憐의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각박한 현실에서는 생존도 해야 하지만 미래를 향해 도약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볼 때 생존이란 문제에 삶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눈앞의 문제만 골똘할 뿐 손해 볼 짓은 아예 하지조차 않는 '現實主義者'와 그 건너편에는 자유와 인권 혹은 통일 등 현실과는 어찌 보면 동떨어진 일들을 오히려 우선시하는 '이상주의자'도 있다. 이 상반된 방식을 보고 어떤 한쪽의 손을 들어준다면 반대편에서는 못마땅해할 것이다.
이러한 상반된 삶의 태도 속에서 아직 일반인들은 사회의 정의나 세계의 평화보다 내 집 마련이나 자녀 입시 혹은 재산 증식과 같은 개인적인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갖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긋지긋한 가난을 물리치고 경제성장을 이룩한 현재의 시점에서 최소한 나만 배부르면 된다는 식의 편협된 사고로부터는 탈피해야 하리라 본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는 과거 춥고 배고플 때와 비교해 생활수준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졌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무질서가 횡행하고 진보 보수 간 뚜렷한 대안도 없이 소모전만이 펼쳐진다. 현재보다 나아질 수 있는 참신한 대안이 나와야 하는데 그건 더 이상의 이념적 대립보다는 실용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 중국에서조차 시대의 화두가 된 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일으킨 덩샤오핑이 1979년 미국을 다녀오며 했던 말인 黑猫白猫論이 그것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