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주관적인 것인가? 아니면 객관적인 것인가? 가령 주변에서는 자신을 행복하다고 하는데 자신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 반대로 남들은 행복하지 않으리라 보는데 자신은 행복한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는 그리 흔하지는 않다. 하지만 통념적인 시각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기본생활이 안정되고 만나서 즐거운 대화를 나눌 지인들이 있고 속한 분야에서 인정과 존경을 받는 경우라면 한마디로 남부럽지 않은 삶, 다시 말해 행복에 가까운 삶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는 진정한 행복이 아닐지 모른다.
인간은 어릴 때부터 부모나 친지들로부터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수 없이 듣는데 이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공부가 최고라는 얘기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 지금까지 육십 평생을 살면서 판단하기에 날 때부터 삶은 어느 정도 윤곽이 정해지는 듯하다. 재능이 없는 일에 도전하면 百戰百敗이다. 따라서 자신이 재능이 있는 쪽에 승부를 거는 게 정답이다. 공부의 경우도 열심히만 한다고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비슷한 두뇌일 경우 노력을 더 한쪽이 낫긴 하다. 하지만 두뇌가 뛰어난 경우에는 조금만 노력하면 남들이 쫓아갈 수 없을 정도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공부 외에 자신이 더 잘할 수 있고 더 만족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면 그 길을 모색하는 것도 행복할 수 있는 괜찮은 대안이 될지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通念化된 행복의 개념은 남보다 안정적인 직업을 갖는 것으로 일축된다. 그러한 직업군이 의사, 판검사나 변호사, 회계사, 변리사 등 전문직과 대학교수나 대기업 임원 등이다. 그런데 여기에 해당하는 이들이 전체 인구의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사실 여기에 들지 않는 이들이 훨씬 많다.
사실 어떤 특정 직업을 가지는 것만이 행복의 해결책은 아닌 이유는 일하면서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도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같은 일이라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일을 한다면 감사하는 마음은커녕 일이 짜증스럽기만 할 수도 있다.
세상에는 이러한 통념적 행복에 정면 도전한 이들이 있다. 우선 醫士의 길을 뿌리치고 歌手가 된 경우인데 그 장본인이 윤형주이다. 그는 많은 愛創曲을 불렀으며 대중들은 그의 노래를 들을 때 환호를 터뜨렸다. 노래 외에도 그는 솔선수범해서 '집 지어 주기'에 나섰으며 CM송 전문 광고회사를 설립하여 성공적으로 경영하였다. 그는 TV에서 한 번은 자신은 좁은 진료실에서 하루종일 환자를 보는 의사란 직업을 했다면 별 만족을 느끼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그것보다는 전 세계를 누비고 싶어 했다고 했는데 실제로 벌써 엄청난 여행을 했다고 했다.
또한 의사의 길을 마다하고 시키지도 않는 險地에 가서 荊棘의 삶에 도전했던 이가 있다. 그 장본인이 바로 이태석신부이다. 그는 어렵게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다시 공부해 성직자가 된다. 그리고는 다른 성직자들이 기피하는 아프리카 남수단에 가서 그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을 치료했을 뿐 아니라 학교를 짓고 직접 가르치기도 했으며 악대부를 만들어 지휘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급기야 대장암이 걸려 47세로 생을 마감했다.
위의 경우를 볼 때 문득 행복도 爭取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통념적인 행복만으로 스스로 戰慄을 느끼기는 힘들다. 반면 남을 쫓아가는 행복과 달리 자신이 선택하고 개척해서 성취한 행복은 다소 險路가 될지 모르지만 훨씬 짜릿하고 생동감이 있다. 이는 자신뿐 아니라 진정 살아있는 행복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이 시대의 많은 이들로 하여금 새로운 차원의 행복이 뭔지를 깨닫게 해 주는 밀알이 되기에 더욱 그러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