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이 늘 사회를 감싸고 있던 시절 대한민국은 전쟁 후 실업이 만연될 때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었다. 당시에도 독일은 이미 유고, 터키, 아프리카 등지에서 많은 광부 종사자를 데려왔다. 하지만 이들은 나태하여 결국 광산을 폐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온 광부들이 근면하게 일하며 생산량이 좋아지자 독일 신문들이 이를 극찬하며 급여 외에 보너스까지 줘야 한다는 여론도 형성되었다. 간호사의 경우에도 독일에서는 특근수당을 준다고 해도 야간근무를 모두 기피했지만 한국 간호사들은 조건을 따지지 않았으며 자질도 우수할 뿐 아니라 몸을 사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일을 하였다. 이들 광부나 간호사들의 대한민국 국가 이미지 제고로 인해 결국 독일 정부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독일에 초대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인간이 생활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의식주 문제로부터의 해방이다. 하위층이 중류나 상류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종잣돈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아껴 쓰면 기본생활 정도는 큰 문제없이 할 수 있는 나라가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현재 세계 곳곳에는 기아로 허덕이는 곳이 꽤 많이 있고 아직 폭동이 발생하는 나라들까지 있다. 거기에 비해 우리는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 전 국민이 '잘 살아 보세'란 노래를 목청 높여 부르던 70년도에는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나랑 한 친구를 시켜 모금한 불우이웃 돕기 성금과 쌀을 같은 반 친구 집에 갖다 주라고 한 적이 있었다. 갔던 집은 단칸방이었는데 그 집 가장은 실직 혹은 무직이었던지 대낮에 집을 지키며 끼니도 해결 못한 채 있더니 시커먼 얼굴로 돈과 쌀을 건네받고는 옆집 아주머니에게 목이 메인 소리로 "참 고맙네. 어쩨 이리 고맙겠니."란 말을 하였다.
우리는 전후세대로서 전쟁 때 사람이 죽거나 굶주린 참혹한 모습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어린 시절 해마다 6월 25일이 되면 흑백 필름으로 피란민들 행렬 혹은 기차 위까지 사람들이 짐짝처럼 실려 피난 가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한참 후인 70년대 초반까지도 아침식사 시간이면 거지 아저씨들이 집에 들어와서 라면 봉지에 밥과 반찬을 주워 담아 가던 걸 본 기억이 있다. 그때는 나병환자들 소위 경상도 말로 '문둥이가'들도 대문이 잠겨있지 않을 경우 문을 밀고 들어와 동냥을 해갔다.
우리는 어릴 때 반찬투정이라도 할 경우 어른들로부터 고생을 안 해 보니 삼시세끼 먹는 것을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꾸중을 듣곤 하였다. 지금 우리도 자녀들을 보면 호강에 겨웠다고 얘길 하겠지만 우리 자녀들도 현재의 안락한 생활에 대해서는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과거 헐벗고 굶주릴 때의 생활로 돌아가서 그리 한번 해보라고 한다면 아마도 정신 이상자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 풍요로움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일부러라도 한 번씩은 그리 해보는 것도 그리 어리석은 일은 아니리라. 만일 서울시 혹은 대한민국 정부 주최로 하나의 이색 이벤트를 실시해 본다면 어떨까? '한국전쟁 때의 생활 체험'이나 '기아 체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