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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봉기 Mar 05. 2022

인간이 사는 세상

슈바이처와 이태석 신부의 삶




인간이 사는 세상이 갈수록 차가워져 간다. 우리가 받아들여 경제이념이 된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자본이 중심이다  보니 인간보다 돈의 가치를 우선한다. 따라서 경제가 성장하여 개인소득도 높아지고 생활수준도 향상되지만 못살던 시절보다 마음의 여유는 오히려 못해지고 인간들 간 불신과 이기주의가 판친다. 날씨가 쌀쌀해질 때 따끈한 국물을 찾듯이 매정한 세상에서는 인간들 간의 훈훈한 대화가 갈수록 그리워진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경쟁의 파고는 갈수록 높아진다. 경쟁에서 질 경우 영원한 패배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이 늘 따라다닌다. 이런 식이다 보니 세상이 비인간적이고 삭막해진다. 생존경쟁이란 현재뿐 아니라 어느 시기 어느 곳에서나 있던 것이지만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지고 물질주의가 만연됨에 따라 삶의 분위기는 더욱 살벌해진다. 독하게 살지 않으면 도태되고 도태되면 인간 대접도 못 받게 되는 게 세상이다. 어차피 살아 봤자 한평생인데 이렇게 사는 게 뭔 의미가 있을까? 누구나 속으로 이러한 생각을 하지만 딱히 이를 대체하거나 극복할 대안이 없기에 더욱 답답해진다. 이러한 세속적인 삶의 환경에서 살신성인했던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공히 의사 타이틀 하나만 가지고도 평생 별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으련만 일부러 사서 생고생을 했던 사람들이다. 슈바이처 (1885~ 1965)와 이태석 신부 (1962~2010)가 그들이다.


슈바이처는 독일계 프랑스인으로 음악에 재능을 보였으며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여, 칸트의 연구로 철학박사를 받았다. 그 후 아프리카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고통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학공부를 하여 1913년 의학박사가 된다. 그리고 프랑스 적도 아프리카 (현재 가봉)에 가서 의료 봉사활동을 한다. 그는 주변 도움을 제대로 받지도 못한 채 힘들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다 1952년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하지만 그 상금으로 나환자 병원을 짓는다. 1960년 적도 아프리카가 독립하여 가봉공화국이 되었는데 그는 흑인들의 변함없는 경외를 받고 90세의 생일을 지나 건강이 악화되며 아프리카의 랑바레네에서 세계인의 애도 속에서 사망하였다.


이태석 신부는 경남고 졸업 후 81년 인제대 의대에 입학 87년 졸업, 90년 군의관으로 복무한 후 91년 살레지오 수도회에 입회, 2001년 사제서품을 받고 아프리카 수단의 남부 톤즈로 향했다. 톤즈는 아프리카의 최고 오지였고 내전으로 폐허가 된 지역이었다. 여기서 그는 선교활동을 펼쳤으며 말라리아와 콜레라로 죽어가는 주민과 나병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흙담으로 짚풀로 지붕을 엮어 병원을 세웠다. 또한 병원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척박한 오지마을을 순회하며 진료하였다.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주민들을 위해 농경지를 일구었고 학교를 지었으며 치료 목적으로 음악을 가르쳤는데 예상외의 효과가 있자 브라스 밴드를 결성하여 국가행사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하에서 고군분투하다 미처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 못하고 입국하여 2008년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았으며 2010년에 48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세상이 각박할수록 자신의 온몸을 던지는 사람도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세상에도 희망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가 심훈의 장편소설 '상록수'도 일제강점기에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농촌에 가서 계몽운동을 하는 내용을 다루는데 자기 자신의 출세보다 힘든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내용이다.


이태석 신부는 어렵게 의과대학을 마치고

천주교 신부가 되었는데 그때 가족들 특히 모친은 반대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 후 오지에 가서 젊음을 불태울 결심을 할 때에도 그러했을 것이다. 영화 '울지 마 톤즈'에서 그가 오지에서 어린애들에게  주사를 놓던 모습, 한국에 들러 기금 마련 콘서트에서 기타를 치며 '꿈의 대화'를 부르던 모습, 요양원에서 항암치료받을 때 간절하게 '열애'를 부르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아쉽게도 그가 혼신을 다해 타지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에도 천주교에서는 그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현대판 예수'라 할 수 있는 그의 존재가 부각되는 것 자체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다가 그가 사망하고 나서야 천주교 신부의 고귀한 삶이라 적극 홍보했다. 그가 한국에 들렀을 때 서울교구에서 강연을 하려 했는데도 광주교구 소속이라고 그를 내쳤던 일도 있다. 말로는 사랑 그리고 예수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를 진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도 세속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점은 통렬한 비판과 반성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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