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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봉기 Jun 23. 2024

信仰이란 과연 어떤 걸까?

사전에 나오는 '信仰'의 의미는 "믿음의 대상을 굳게 믿고 가르침을 지키며 이를 따르는 일"이다. 또한 이는 사람의 의지와 노력으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을 덧입을 때 가능하며 따라서 내 힘으로가 아니고 위로부터 하느님께서 주시는 恩惠로 가능하다고 한다. 또한 '宗敎'는 "초인간적 세계와 관련된 신념이나 의례 등으로 구성된 문화현상"으로 정의하기에 종교를 가진 이들을 일반적으로 신앙인이라 부른다.


나는 현재는 신앙인이라고 감히 남들 앞에서 말하지 않지만 한때 신앙의 열정이 꽤 강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하느님을 믿고 계명을 지키며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기본자세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주일에는 빠짐없이 교회에 나갔고 기타 교회의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으며 교회 내에서 올바르지 않은 행동이나 태도를 보게 될  경우 그냥 넘어가지 않기도 하였다. 이러한 때 묻지 않은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 자체를 비난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주일날 교회에 빠짐없이 나가서 눈을 감고 기도를 하면 사랑이 충만해지고 세속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건지 또한 그리하면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건지 등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붙기도 하였다.


만일 예수님이 聖書에서 보여주었던 대로 크리스천들만이라도 재물이나 출세 등 세속에 대한 욕심을 지양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다면 전쟁이나 범죄를 포함해 기아나 자살과도 같은 일이 사라지며 세상이 천국과 유사해질지 모른다. 하지만 교회가 이리도 많고 크리스천의 수도 늘어가건만 세상은 온갖 범죄가 기승을 부리며 심지어 자살률도 높아지기만 한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지기만 한다.


성서에 따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罪人인 인간 대신 희생됨으로써 인간은 구원을 받게 되었지만 사탄이란 존재가 인간을 하느님으로부터 이탈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욕심과 猜忌를 포함해 모함과 대립 그리고 거짓 등 온갖 악한 일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한 일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이들 중에서는 힐링 내지 평화를 찾고자 교회의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들 중 상당수는 이기적인 신앙인들 일지 모른다. 가까운 이웃들까지 생존의 위협 속에서 심지어는 自殺까지 하건만 자신의 安慰만을 위해 신앙이란 노끈으로 풍랑 속에서 몸을 칭칭 감아버리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희생과 봉사의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信仰이란 과연 어떤 걸까? 성직자들 중에서도 죽어서 가는 천당보다 삶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데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있다. 이를 제대로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 故人이 된  '울지 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이다. 그는 평생을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처럼 살다 삶을 남들보다 일찍 하직한 성직자였다.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성직자들이 있건만 이태석과도 같은 이를 찾기는 왜 그리 힘든 것인가? 그것은 모르긴 해도 과감히 자기 자신을 버리려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殺身成人이란 말은 그다지 쉬운 말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을 돌보기에도 버거운데 남을 우선하기란 무척 어렵다. 그렇다면 "자신을 우선 돌본 후 여력으로 남을 배려하면 되겠지"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관심이 일단 자신에게 집중되면 그 초점이 남을 향하게 하기도 무척 어렵다.


그러한 인간의 비이타적인 속성과 더불어 교회란 공동체에는 이미 치유가 어려운 무서운 병균들이 침투해 있다. '기득권'과 '기복신앙'이 그것들이다. 말로는 사랑을 외치지만 마음속에는 예수를 모함하고 이단으로 몰았던 이스라엘의 기득권자 '바리사이'가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 혹자는 다시 예수가 세상에 온다면 제일 먼저 그를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주장할 이들이 바로 현재의 성직자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어렵게 쌓아놓은 현실적인 기득권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기복신앙'이란 것도 교회에 사람이 모이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주일에 교회에 빠지지 않고 교회에 헌금을 잘 내면 그 대가로 가족들이 질병이나 재앙으로부터 안전하고 가난을 면하며 하늘로부터 祝福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적인 신앙보다는 존재 자체에 대한 깊은 감사를 바탕으로 이웃과 사회 그리고 세계로 나아가 말로만이 아닌 진실과 실천을 담는 신앙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하리라 보인다. 모르긴 해도 세상의 참주인인 창조주는 기복신앙인들보다 남들의 안위까지 함께 고민하는 참된 신앙인들을 더욱 사랑하여 그들에게는 공기와 햇볕이나 바람 말고도 특별한 선물을 선사하리라 보인다. 그 선물은 눈으로는 보기 어렵고 가치를 측정하기는 힘들지만 눈처럼 희고 아름답고 영원할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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