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통과도 같던 여름이 가고 나니 이제 울긋불긋한 단풍이 물들고 낙엽이 길바닥에 뒹구는 가을이 되었다. 30여 년 전 군에서 전역을 한 후 이맘때쯤 이화여대 앞에서 20대 초반의 여대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억과 그보다 한참 전 만추 때 혼자 신촌의 어느 소극장에서 70년대 대학가의 낭만과 우수를 담은 영화 '바보들의 행진'을 감상하고 어둑해질 무렵 걸어 나오던 기억이 머리를 스친다. 가을은 특히 남자들이 마치 단풍이라도 든 눈으로 세월의 흐름을 지켜보는 계절일지 모른다.
봄은 여자의 계절,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들 하는데 그 이유가 여자들은 빛에 또한 남자들은 온도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겨울이 지나 햇살이 환해지는 봄이 올 때 여성들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게 되는 반면 남성들은 무더위가 끝나고 갑자기 서늘해질 때 마음의 평정이 깨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20대 때 가을이란 이름의 强盜는 불쑥 담을 넘고 나의 집을 침입해 '고독'과 '우수'란 딱지가 붙은 밧줄에 나를 묶고는 꼼짝도 못 하게 하였다. 집을 떠나 객지에서 그것도 특히 낯선 타국에서 보내던 가을은 늘 쓸쓸함이란 공간에 나를 가두곤 했다.
대한민국에 사는 이들은 세계에서 비발디의 '四季'를 누구보다 잘 감상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아프리카나 남미를 포함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사는 이들은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을 겪지 못하기에 찬 기운이 사라지고 찾아오는 솜이불과도 같은 봄기운의 포근함을 감히 알지 못한다. 또한 남극과 북극을 포함해 알래스카와 같은 곳에 사는 이들은 무더운 여름을 난 후 찾아오는 수확의 기쁨이 뭔지 모른 채 산다.
하지만 우리는 사계절인 봄 여름 가을과 겨울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고 머지않아 닥칠 다음 계절에 대비하는 준비 또한 남다르다. 뜨거운 태양아래서 땀을 흘리며 지내는 여름이 끝나고 찾아오는 서늘한 가을만큼 사고를 왕성하게 해주는 계절은 없다. 가을은 춥지도 덥지도 않아 사색하고 독서하기 좋을 뿐 아니라 낙엽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도 언젠가는 떨어져 땅 위에 뒹굴게 될 존재임을 눈으로 확인하게 한다. 우리는 매일 돈벌이를 하며 바쁘게 살지만 우리의 존재와 운명에 대해 한 번씩은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가질 필요도 있다. 그리 한다고 뾰족한 해답을 찾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처럼 자신이 사고의 주체이며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는 건 존재에 대한 의미부여라기보다 생존의 강박관념으로 인한 소유에의 집착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소유는 존재를 지탱하는 중요한 수단이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건전한 사고를 파괴하는 암세포가 되기도 한다. 소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존재의 의미를 일깨우는 데만 목숨을 걸었던 이들이 예수와 석가모니 그리고 공자이다. 이들은 모습을 감춘 지 이미 수천 년이 지났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국경을 넘어 어두운 하늘의 별처럼 찬란하게 빛날 뿐 아니라 진흙탕과도 같은 세속에서 부대끼는 인간에게 알파와 오메가가 되어준다.
계절의 변화 속에서 피었다 지는 꽃처럼 영원하지 만은 않은 인간은 주어진 삶의 과정 속에서 과연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를 놓고 고민해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뒹구는 낙엽과 앙상한 가지가 남아있는 나목을 보며 현재 우리를 지켜주는 소유물들도 머지않아 이런 모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은 암만 욕심을 부리더라도 한마디로 말해 흐르는 세월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권력과 재산과 쾌락을 추구하는 데 올인하는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다. 부디 눈이 내리고 찬바람이 불기 전에 뒹구는 낙엽을 보며 현재 가지고 있는 욕심과 오만 그리고 가식일랑 용광로에라도 던져 녹여버리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