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봉기 Nov 29. 2024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삶이란 뭘까?

윤동주(1917~45) 시인의 序詩는 1941년 시인이 25세 때 집필한 시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길 나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로 시작한다. 나는 10대 때 그 시를 처음 접했고 그 후에도 이따금씩 대할 일이 있었지만 환갑이 되어 똑같은 문구를 떠올려보니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우선 序詩에서 '바람'이란 시인의 불안과 고통을 상징하는데 실제로 시국이나 가정에 대한 불안과 걱정, 개인적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과 같은 편치 않은 심정 등이 담긴 시어라고 한다. '한점 부끄럼 없길'이란 표현은 결벽에 가까운 시인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다.


20대였던 시인의 마음은 티 없이 맑고 이상적이기만 하여 눈에 펼쳐지는 세상은 진흙탕으로만 보였는지 모른다. 나 자신도 그 나이 때에는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시인은 서른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에 현재의 예순인 내 삶의 절반 정도까지 산 것이다. 파도 없는 잔잔한 호수 위에 띄운 배에 앉아 순수함이란 옷을 입고 홀로 처절하게 노를 젓다 삶을 마감한 이가 윤동주라 생각된다.


인생을 여든까지로 볼 때 어느 나이이든 딱히 만만한 때는 없어 보인다. 유아기를 지나 학창 시절을 거쳐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경쟁과 인간관계 속에서 사실 마음 편할 날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을 내려놓고 노후를 맞이할 때가 되니 그간 살아온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다. 현실과 이상 속에서 늘 불협화음을 느끼던 일, 결혼 전 순수한 맘으로 한 이성을 사랑했지만 결국 인간을 놓고 마치 물건처럼 흥정하던 속물의 모습을 보면서 아연실색했던 일, 일의 과중함과 압박감속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던 일, 굶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향후의 생존문제 속에서 고민하던 일 등으로 부대끼며 지금껏 살아온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도 없이 산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정직하게 또한 떳떳하게 산다는 건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이고도 당연한 얘기일 수 있다. 하지만 깨끗하게 사는 이들은 우직하다거나 융통성이 없다는 말을 듣고 그때그때 하이에나처럼 얼굴을 바꾸며 남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이들은 사회생활을 잘한다는 말을 듣는 세상이 되었는지 모른다. 지식인들 가운데에는 지식 따로 행동 따로인 경우가 꽤 많다. 하지만 내가 존경하는 지식인 한 분은 실천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는 자신의 키가 157cm로 병역면제 대상이었음에도 자원입대를 하였는데 정치권의 유명인사들 중에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병역을 면제받은 이들도 더러 있다. 그러면서 어찌 국가의 안위를 놓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기업의 구매부문에서 오래 근무한 후 정년퇴직한 지인의 말에 의하면 업무 관련 리베이트성 봉투를 상습적으로 받던 이들은 오히려 수명이 더 짧더라는 것이다. 이를 보고 小貪大失이라 한다. 그는 어느 업체에서 건네었던 봉투를 그대로 당회사의 계좌로 송금했더니 그 후로는 일체 봉투를 주지 않았는데 그런 식으로 일을 해서 그런지 남들보다 더 오래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고 했다. 회사에서도 모르는 것 같아도 누가 어느 정도의 뒷돈을 받는지 정도는 알고 있더라고도 했다.


세상은 갈수록 오염되다 보니 맑은 시냇물은 보이지 않고 진흙탕 투성이만 보인다. "물이 너무 맑아도 고기가 살지 않는다"는 말도 있긴 하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다 보면 어느 정도의 융통성은 필요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도에 어긋난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면서 착하고 올바르게 사는 이들을 융통성 없는 무능한 사람으로 매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윤동주와 같은 사람이 이 시대에 있다면 더러운 세태 속에서 환멸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2, 제3의 윤동주가 있어야 세상이 덜 부패하리라 생각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