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나 스승 혹은 연장자에 대한 존경은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중요한 도덕규범으로 자리 잡아왔다. '효도'나 '장유유서'와 같은 단어는 '겸손'이란 말처럼 영어사전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서양에서는 부모까지 'you'라고 부를 뿐 아니라 어른이나 애나 구분 없이 그냥 'you'이다. 수직적인 상하관계보다는 연장자든 연하든 서로 친구처럼 격의 없이 지내는 그들이다. 또한 이와 더불어 'Give and Take'나 'No pain No gain'과 같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걸 좋아하며 손해 볼 일은 잘하려 들지 않는 그들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현실적'이라는 것만으로 채워지는 대상은 결코 아닐지 모른다. 달리 말해서 때로는 비현실적일 필요도 있다. 나이를 먹어 가진 돈도 없고 기력이 떨어지더라도 삶의 경험과 깊이는 돈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인데 현실적인 이용가치가 떨어진다고 저평가한다는 건 배은망덕한 태도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팔팔한 젊은 세대가 퇴물이 된 고령자들이라고 무시하려 든다면 자신들도 늙어 퇴물이 되면 똑같이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운 놈일수록 떡 하나 더 준다"는 말 또한 비슷한 각도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밉다고 차별할 때 생기는 불만과 배신감은 '문제아'나 심할 경우 '범법자'가 되게 할 수도 있다. 이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인간에 대한 아량과 포용을 갖게 하는 건 '성적'이나 '자격증' 혹은 '학위'가 아닌 인간이 되게 하는 정신교육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학교라는 곳이 그 정도의 일까지 해낼 수 있는지에는 의문이 생긴다. 환갑이 된 나의 기억 속에 과거 교사들은 지금과는 달리 박봉에 수업 외에도 많은 잡무에 시달리다 보니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그리 높지 못했다. 개중에는 촌지에 눈이 어두워 있는 집 애들과 없는 집 애들 또는 공부 잘하는 애들과 그렇지 않은 애들을 차별하는 교사들도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79년 당시 학교 정문에 "스승을 존경하자"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퇴교할 때 누군가가 "얼마나 선생들을 존경하지 않았으면 저런 게 붙어 있을까?"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2년 후 세상을 뒤집어놓는 일이 벌어졌다. 한 중학생이 행방불명된 지 일 년이 지나도록 범인을 잡지 못한 채 사건은 미궁에 빠졌는데 그 후 실종된 소년이 마지막 만났던 교사를 재수사하는 과정에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며 세상은 발칵 뒤집어졌다. 범인이 그 학교의 교사로 밝혀진 것이었다. 노름빚으로 시달리던 한 체육교사가 다른 학교에 있을 때 자신이 성추행했던 여학생 제자 둘을 데리고 유괴극을 벌여 돈을 요구하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유괴한 애를 죽여버린 것이었다. 두 여고생은 유괴범이었던 그 교사를 너무 사랑했다는 말을 남겼고 문제의 교사는 "제 처와 자식은 안 그런데 저는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사형집행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천인공로할 일은 극히 예외적일 수밖에 없으며 대부분의 교사들은 자신이 맡은 일에 여념이 없으리라 보인다. 훌륭한 교사는 자신이 맡은 과목의 실력만으로 되는 건 아니다. 교사는 가르치는 걸 주업으로 하는 직업인이지만 급여를 받은 만큼 가르치는 일만으로 교사의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다. SKY대학을 하나 더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도소에 갈 인간을 죄짓지 않고 살게 하는 것 또한 이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