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괴테(1749~1832)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모른다"는 명언을 남겼다. 지금은 개인소득이 3만 불을 넘는 선진국으로 도약한 대한민국에서 전후세대는 겪어볼 일이 없던 배고픔의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환갑이 지난 나의 경우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살다 보니 우리 부모세대가 경험했던 전쟁의 참상은 저 먼 나라의 얘기 같지만 아직 간접 경험을 통해 뇌리 속에 남아 있다.
대학교 졸업반이던 1985년 서울에서 공부하던 내가 잠시 부산의 집에 들렀던 어느 날 오후시간에 삼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던 누군가가 불쑥 대문을 열고 들어와 퉁명하게 "밥 좀 주십시오"라는 말을 하였다. 그 시절만 해도 밥 굶는 사람은 없었는데 모친께서는 부친과 상의했는지 밥 한 공기와 반찬을 담은 그릇을 그에게 건네주었고 그 사람은 마루옆에 앉아서 그걸 먹고는 일어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떠났다.
이제 4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로 덮어버리기엔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든다. 그 이유는 뭘까? 당시 약사로서 그런대로 부유했던 부친도 그로부터 35년 전 10대 후반에 그보다 더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75년 전인 한국 전쟁 때 강원도 정선에서 나의 부친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알지도 못하는 집에 들어가 먹을 걸 달라고 애걸했던 일이 있었다. 당신은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안시리에서 10대를 보냈는데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여덟 살 위의 새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설상가상으로 인정이라곤 없는 삼촌으로부터 늘 꾸중을 듣고 지내며 편안하지 못했던 중에 어느 날 말도 없이 집을 나가 인민군에 입대를 했는데 그 후 6개월이 지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부친은 회령에 사령부가 있는 인민군 15사단의 포병으로 전쟁이 터지자 남으로 이동했는데 전운이 감돌 때 미리 장병들의 휴가를 금지시키고 매복전을 펼친 김종오 대령의 국군 6사단 7연대와의 치열한 가평전투가 벌어졌다. 부친의 부대는 화염에 쌓인 탱크를 지나 여주에서 장호원을 거쳐 불과 며칠 사이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대구 팔공산까지 내려갔다. 그러자 미해병대를 비롯한 국군 3개 사단과의 피비린내 나는 낙동강전투가 벌어졌다. 그 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자 인민군들은 북으로 후퇴한다. 강원도 정선에 이르러 미군의 비행기폭격 때 낙오되어 부대를 이탈하여 패잔병이 된 부친은 민둥산을 떠돌며 화전민들이 기거하는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 밥을 좀 먹게 해 달라고 애걸했다. 도토리와 옥수수 그리고 감자로 버무린 죽을 먹고 나면 쏟아지는 졸음을 참을 수 없어 문옆에 쪼그리고 앉아 세상모르게 자고 나서 일어나면 주인이 조심스럽게 하는 말이 자기 집에 있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자칫 그 사실을 국군이 알면 적군 은닉죄로 처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멀쩡한 가정집에 대문을 열고 들어와 밥을 먹게 해달라고 했던 사람의 정체는 알 수 없다. 모르긴 해도 주머니에 가진 돈도 없고 배는 고팠던 모양이다. 인정이라고는 없는 사람이라면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거야" 하고 쫓아 보냈을지 모른다. 혹여나 나쁜 마음을 품은 이라면 그런 식으로 낮에 동태를 살핀 후 저녁에 몰래 들어와 도둑질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밥을 굶어본 이라면 인간에게 닥치는 최악의 고통인 배고픔으로 신음하는 걸 보면 연민의 감정을 떨치기 어렵다. '변호인'이란 영화에서는 배가 고픈데 돈이 없는 가난한 고시준비생이 돼지국밥을 시켜 먹고는 음식값을 내지 않고 도망갔다 고시에 합격한 후 주인을 찾아와 갚지 못한 음식값을 내려 하자 주인은 웃으며 괜찮다고 말한다.
성공을 한 사람 중에는 과거에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 시절 자신이 겪은 일을 떠올리면서도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다지 유쾌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지금 자신은 다른 국적을 취득한 사람과도 같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씁쓸함을 달콤함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밤을 새워 인생을 논할 가치가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