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긴장과 경직 속에서 살아온 조직에 예고 없는 봄바람이 불었다. 아니, 이건 차라리 '여름방학'에 가까운 소식이었다. 새로 부임하신 과장님. 퇴직을 딱 6개월 앞둔, 인생의 황혼기를 준비하는 분이 우리 부서의 수장으로 오셨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첫 만남을 기다렸지만, 과장님은 부임하시자마자 보란 듯이 2일 연가를 던지셨다. "나 좀 쉬다 올게"라는 무언의 메시지. 그동안 전임자들의 서슬 퍼런 눈치 아래서 숨죽여온 직원들에게 그 2일은 단순한 휴무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좀 편하게 지내도 된다'는 해방의 선언문이었다.
서무의 메일, 그 짧고 강렬한 복음(福音)
오늘 드디어 과장님의 첫 출근날. 사무실엔 묘한 긴장감과 기대감이 공존했다. 그때, 서무로부터 전체 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안내드립니다. 과장님 점심은 앞으로 팀별로 모시지 않아도 된다고 하십니다."
모니터 앞에 앉아 있던 직원들 사이로 보이지 않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점심 모시기'. 누군가에겐 별거 아닌 일일지 모르나, 상사의 입맛을 맞추고 대화 주제를 고민하며 소화제를 찾던 우리에겐 거대한 바위 같은 숙제였다. 그 숙제를 과장님은 부임 첫날, 단칼에 베어버리셨다.
사무실 곳곳에서 '와!'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마우스 클릭 소리가 한결 경쾌해졌고 사람들의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스르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무언의 함성'이 공기 중에 가득 찼다.
인생, 잠시 쉬어가도 좋다는 신호
아들의 졸업식에서 '사람 일 모른다'는 기적을 맛본 지 얼마 되지 않아, 일터에서도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수능 점수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듯, 빡빡한 조직 생활의 규율이 성과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과장님은 퇴직을 앞두고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쳐주고 싶으신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밥은 마음 편한 사람들과 먹는 게 제일이다"라는 아주 단순하고도 소중한 진리를 말이다.
앞으로의 6개월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긴장으로 굳어있던 글쓰기에도 조금은 말랑말랑한 여백이 생기지 않을까.
투쟁과 기록으로 점철된 일상에, 과장님이 선물해 준 이 '느슨함'이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