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마지막을 색으로 물들다
예쁜 단풍이 물드는 계절이 오면 사람들의 마음도 설렘에 젖는다.
여름 내내 무성하던 푸른 잎들이 붉고 노랗게 변하며 온 산하를 화려하게 채색하기 때문이다.
달콤한 가을바람이 불면 하늘은 더욱 높아지고, 사람들은 어김없이 산과 들로 향한다.
소문난 명소에는 단풍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들은 무더운 여름 내내 지친 마음을 위로받고자 한다.
자연이 선물하는 짧고도 아름다운 계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붉은 잎이 바람에 흩날릴 때마다 얼굴마다 미소가 번진다.
가을은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적신다.
주말이 되면 시내 곳곳에는 전국 각지로 향하는 단풍 관광버스가 줄지어 늘어선다.
길게 줄 서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은 매년 단풍철마다 되풀이되는 풍경이다.
아내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우리도 어디론가 떠나볼까?” 하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먼 길을 떠나는 일에는 큰 흥미가 없다.
길 위의 고생보다는 가까운 곳에서 조용히 단풍을 느끼는 쪽이 가성비가 높다.
북한산, 남산, 청계산, 도심공원 같은 곳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풍광이 빼어나 언제 찾아도 만족하다.
오늘은 석촌호수 둘레길을 찾았다.
호수를 따라 늘어선 벚나무들이 늦가을의 햇살을 받아 고운 빛으로 물들어 있다.
봄이면 연분홍 벚꽃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이던 나무들이 이제는 붉은빛과 노란빛, 갈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또 다른 매력을 뽐낸다.
성질 급한 잎들은 이미 단풍이 되어, 나무에서 떨어져 인도 위에 흩날린다. 느긋한 가지들은 아직 자신의 색을 다 피우지 못한 채 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호수의 물결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오리 떼는 한가롭게 그 위를 미끄러진다.
바람이 일 때마다 수면 위에 단풍빛이 흔들린다. 그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잔잔하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뷰티풀!”을 연발하며 이 풍경을 사진으로 담는다.
지팡이에 의지한 어르신은 천천히 휴대폰을 꺼내 초점을 맞춘다.
가족 단위로 나온 사람들은 웃으며 포즈를 취한다. 아이들은 낙엽을 주워 하늘 위로 던진다.
그 순간, 호수는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가을 하늘을 바라본다.
사계절은 우리의 인생과 닮아 있다.
태어나 자라 꽃을 피우고, 무성한 푸른 잎의 전성기를 거친 후, 어느덧 단풍처럼 빛나는 노년을 맞는다.
그리고 저마다의 시차는 다르지만 결국 낙엽처럼 떨어져 흙으로 돌아간다.
그 생각에 마음 한편이 숙연해진다.
단풍잎 하나가 내 어깨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붉은 물감을 입힌 듯 정교한 수공예품 같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자연의 이치란 참 오묘하다.
단풍철의 숲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름 없는 잡초나 작은 풀들도 저마다의 색으로 물들어 하나의 풍경을 완성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다투지 않는다.
큰 나무의 그늘 아래에서도, 바람이 세찬 길가에서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빛난다.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모습일 것이다.
인간 세상도 이와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우리 사회는 종종 서로를 부정하고, 뺏고 뺏기며 끝없는 경쟁에 매여 있다.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서로를 밀쳐내며 살아간다.
하지만 단풍은 서로의 색이 다르기에 더 아름답다.
붉음이 노랑을, 갈색이 초록을 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섞여 하나의 풍경이 된다.
우리 공동체도 그렇게 어우러질 때 비로소 빛이 난다.
나는 생각한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오늘 본 단풍처럼,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아름답게 물들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를 원망하지 않았으면 한다.
서로 나누고 화합할 수 있다면 세상은 온기로 가득하지 않을까.
조화 속에서 배운 이 가을의 교훈을 마음에 새긴다.
나는 천천히 석촌호수 길을 걸었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또 한 장의 단풍잎이 내 앞에 내려앉았다.
그것은 마치 자연이 건네는 한마디 인사 같았다.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음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