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집과 역사 그리고 추억
어린 시절 시골집 회고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주거환경은 빠르게 발전해 왔다.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아파트는 많지 않았다. 당시 우리 동네에도 아파트는 없었고, 모두 단독 주택에서 살았다. 집이 재래식 부엌, 우물, 화장실 모두 불편해도, 그곳에서 사람들은 여유롭게 생활하며 가족 간의 끈끈한 유대감을 쌓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파트 생활 인구가 60% 이상을 차지하며, 아파트는 계속 고급화되고 편의시설도 향상되어 더욱 편리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나는 지금 아파트에서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땔감으로 불을 지피던 온돌 구들방 초가집에서 자란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며, 한편으로는 변화한 주거 환경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린 시절 우리 마을은 300여 가구가 모여사는 배산임수형 양 씨 집성촌이었다. 나는 시골집에서 뛰놀며 자랐다. 정남향으로 지어진 흙집 초가집은 큰 마당을 품고 있었고, 그 앞에는 2단 양철 대문이 있었다. 집은 외관부터 단순하고 소박했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 큰 집으로 꼽혔고, 약 200여 평의 넓은 부지에 담장은 흙과 돌로 쌓아져 있었다. 본채는 4칸으로 방 2개와 대청마루, 큰 부엌이 딸린 큰 방에 작은 다락방이 있었다. ‘ㄴ’ 자 형태로 지어진 아랫채에는 창고방, 소를 가두어 놓은 헛간, 작은 방, 사랑방 등이 있었다. 동쪽에는 창고로 사용되는 지붕 있는 별채도 있었다.
그 집에서의 삶은 물질적인 풍족함보다는 정서적인 풍요로움이 더 중요한 부분이었다. 나는 본채의 큰 방에서 엄마와 함께 지냈고, 누나들은 작은 방을 차지했다.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지내셨고, 일꾼들은 아랫채의 작은 방에서 거주했다. 사랑방은 언제나 아버지의 지인과 손님들로 붐볐다. 아버지의 한시 읊는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붓글씨를 쓰던 벼루의 먹물도 자주 갈아드렸다.
사랑방에서 아버지와 손님들이 나누는 대화는 우리 집안의 역사와 이야기들이 담긴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시절의 일상은 단순했지만 매우 의미 있고 풍성했다.
집 뒤뜰에는 넓은 공간이 있었다. 화장실과 볏짚을 쌓는 공간, 텃밭, 닭장, 돼지우리가 있었다. 아버지의 한약 재료인 목단과 작약을 기르는 큰 텃밭도 있었다. 여름철에는 손바닥만 한 백색과 붉은색 꽃들이 만발했다.
아버지는 큰 방에서 매일 한약을 지었고, 나는 누나들과 함께 약봉지를 싸고 묶었다. 매일 반복되는 그런 일상은 고단했지만, 그 자체로 자연스럽고 또 즐거운 일이었다. 그 시절의 추억은, 단순히 힘든 일들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사람들 간의 정과 사랑을 기억하게 만든다.
집 동편에는 땔감나무와 볏짚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고, 돼지우리와 닭장이 있었다. 100여 년 된 3그루의 고목 감나무는 집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감나무는 여름이면 짙은 그늘을 제공하며, 가을에는 감이 풍성히 열렸다. 수확한 벼와 보리는 마당에서 타작을 했다. 황소가 끄는 달구지가 농산물을 실어 나르곤 했다. 마당 한쪽에는 곡식 저장을 위한 뒤주가 있었다.
사랑방 앞에는 아궁이에 큰 가마솥이 놓여 있었다. 솥은 여물죽을 쑤며 사랑방의 구들목을 데웠다. 아침이 될 때까지도 사랑방은 계속 뜨끈뜨끈 했다.
사랑방 뒤뜰에는 소여 물을 써는 큰 작두가 있었고, 풀과 볏단을 써는 곳이었다. 큰 마당을 가로질러 빨랫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매일 그곳에는 빨래가 걸려 있었다. 아침이 되면 엄마는 빨래를 말리기 위해 빨랫줄에 옷을 걸며 하루를 시작했다.
앞마당 동남쪽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고, 두레박으로 물을 퍼올려 식수로 사용했다. 여름철에는 우물물에 보리밥을 말아먹으며 더위를 식히곤 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수박과 참외를 우물물에 담가 시원하게 먹었다. 엄마가 퍼부어주던 등목은 정말 차가워서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
어린 시절, 나는 친구들과 마당에서 구슬치기, 딱지치기, 자치기 등을 하며 술래잡기를 했다. 집 뒤에 흐르는 개울에서 물놀이를 하고, 겨울에는 얼음놀이를 하며 놀던 추억이 새롭다. 그 시절은 정말 소박하고 순수한 즐거움이 가득했다.
그때의 삶은 기술이나 물질적 편리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사람들 간의 관계와 정서적 풍요로움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시절의 흔적이 사라지고, 재개발로 인해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뒷동산의 복숭아 밭과 서당 재실이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 시절의 추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그때의 추억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의 삶의 방식과 가치들을 되새기게 한다. 그 시절의 삶은 단순히 살아가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조상들의 삶의 지혜와 그들이 살아온 방식은 오늘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내 아이들에게 그 시대의 가치를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시절의 추억과 삶의 방식이 나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 기억들이 오늘날의 나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집과 역사, 추억의 의미일 것이다. 그 집은 단순히 공간을 넘어서, 우리의 삶과 이야기가 담긴 역사적인 장소였다. 집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록이자,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 고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