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햇노인, 사랑에 빠지다

by 구민성

<1>

진행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여보세요. 어디 사시는 누구시죠?”

“나요? 봉천동에 사는… 그냥… 미스타 킴이라고 해두지요.”

가끔 익명으로 전화하는 청취자도 있다. 특히 비뇨기과 방송에서는 더 그렇다.

“네. 전문의 선생님께 궁금하신 걸 물어보십시오. 오늘은 정영민 교수님과…….”

“저기… 그 뭐이냐, 작년까지는 … 발기가 잘 됐는데, 올해 들어서는 갑자기 잘 안 되네요. 왜 그렇지요?”

진행자의 말을 툭 끊고 들어오는 김 씨의 질문에 전문의가 물었다.

“여보세요, 김 선생님. 실례지만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나이요? 이제 여든두 살인데요.”

진행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김 선생님. 82세라면 대부분이 잘 안 되거든요.”

“아니, 아나운서님은 이 나이까지 살아봤습니까?”

“…….”

진행자와 정 교수가 할 말을 못 찾고 있는데 김 씨는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욕이란 건 말이오. 나이보다 건강에 더 관계가 많지요. 젊은 사람도 안 내키면 안 해야 돼요. 억지로 하면 몸 버려요. 하지만 늙은이도 몸 형편이 되면 해야 돼요. 억지로 참는 것도 역시 해롭거든요. 나는요 이 나이까지…….”

“여보세요, 김 선생님. 그렇게 특이한 개인 사정은 병원에 직접 내원하셔서 상담해 주세요. 네, 다음 청취자분 연결하겠습니다. 여보세요, 어디 사시는 누구…….”

윤명애가 라디오를 끄면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얼른 목욕이나 하고 오세요.”

“아니, 아침에 샤워했는데 또 무슨 목욕을 하라고?”

베란다에서 화분 손질하던 민동규가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왜 지금 라디오를 껐느냐는 불만이 얼굴에 묻어 있다.

“샤워만 해서는 안 돼요. 나이 들면 이틀에 한 번씩은 목욕탕에 가서 땀을 흘려야 해요. 안 그러면 노인 냄새가 나서 안 돼요.”

명애는 요즘 남편에게 잔소리가 부쩍 많아졌다. 특히 외모에 대한 잔소리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주로 목욕과 머리 염색, 그리고 옷차림 등에 집중했다.

“늙은이 티가 안 나도록 조심하세요.”

“늙은이라니? 요새 환갑이 무슨 늙은이라고…….”

“그럼 젊은이예요?”

“아니, 그게… 젊은것도 아니고… 그렇지, 햇노인이지 뭐.”

“햇, 노인이라고요? … 그거, 그럴듯하네요. 햇노인이라…….”

명애는 무슨 노리개라도 찾은 아이처럼 밝게 웃었다. 본래 명애는 아주 조용한 여자였다. 동규는 연애 시절에 명애의 조용한 성격에 끌려서 청혼했다. 결혼 후에도 남의 눈에 드러나지 않고, 남의 입에도 오르내리지 않는 얌전한 아내였다. 가난하지만 선하고 열심히 살았다. 알뜰하게 살면서 아이들도 반듯하게 잘 키웠다.

그런데 작년에 자궁암에 덜컥 걸린 것이다. 수술과 항암치료로 몸과 마음이 힘든 것은 당연했다. 짜증과 잔소리가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수술 이후부터 명애는 각방을 쓰자고 했다. 동규는 이해와 동의를 했지만 욕구불만은 나날이 쌓여 갔다.

동규는 좀 소심해서 말이야 안 하지만 성욕을 꾹 누르면서 사는 중이다. 아까 라디오에서 들었던 봉천동 김 씨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여든두 살인데도 성에 대한 욕구를 포기하지 않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이해도 되었다. 너무 참으면 해롭다는 말에도 공감했다.

<2>

동규는 목욕탕 3층의 헬스장으로 먼저 올라갔다.

아령 들고 조금 운동하고 있으니 넉살 좋은 후배 염필우가 들어왔다.

“아따, 형님. 몸 좋으시네요.”

“어, 염 사장. 오랜만이네. 그래 운동하려고?”

“예, 나는 매일 여기서 운동해요. 나이 들수록 근력운동을 열심히 해야지요.”

매일 운동해도 허리가 절구통 같은 필우는 젊은 시절에 힘깨나 썼던 사람이다.

“형님, 몸은 옛날 그대로네요. 목 위에만 60대고, 목 아래는 40대 같아요. 혹시 허리 아래는 20대 아니우?”

“뭔 소리야. 40 대니 20대는 당치도 않고… 다 늙었지, 뭐.”

동규는 필우의 너스레에 기분이 약간 밝아졌다. 하기야 아직도 산에 가면 20대 청년들에게 처지지 않는다. 산에서는 그야말로 펄펄 날아다닌다. 계속 등산을 해서 허리와 다리의 힘도 좋은 편이다.

다만 정신적으로 자신감이 없는 것이 문제다. 스트레스가 많고 지갑이 얇은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필우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운동과 목욕까지 함께 마친 필우가 말했다.

“형님, 오랜만에 만났는데 나가서 커피나 한잔 하십시다. 낮부터 술은 좀 그렇고…….”

“그러지 뭐.”

두 사람은 커피 전문점으로 옮겼다. 필우는 앉자마자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켰다. 지금처럼 복잡한 메뉴를 다 모를 때 필우는 이렇게 말한다.

“형님, 잘 모르면 첫 줄 첫 칸을 딱 시켜요. 그놈이 대표 선수니까요.”

확실히 필우는 시원시원하다. 식당에 가서 밥을 시켜도 이런 식이다.

“사는 사람 마음이지요. 패는 놈이 알아서 패야지, 맞는 놈이 어디에 패 달라합디까?”

커피를 마시면서도 필우는 계속 떠들었다. 그는 말이 무척 많은데 특히 남의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것도 좋은 이야기보다는 험담과 비난이 많다. 그리고 지금처럼 푼돈으로 커피 사주고 더 비싼 술을 잘 얻어먹는다. 친구나 선후배들에게 십만 원 안팎의 빌린 돈도 많은데, 몇 년씩 갚지 않아서 모두가 받기를 포기했을 정도다.

필우의 이런 점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피하기에 바빴다. 그래도 그는 누구와 앉으면 특유의 입심으로 분위기를 장악한다. 오죽했으면 젊었을 때 ‘구찌 빤찌’라는 별명을 얻었겠는가. (구찌 빤찌=입 펀치, 입 주먹 정도의 왜색 비속어)

“형님, 이제 소주나 한잔 하십시다.”

“어, 소주? 아까는 낮에 마시기가… 좀 그렇다면서?”

동규는 술을 거의 안 마시기 때문에 술자리까지는 가고 싶지 않았다.

“허, 형님도 참. 그거는 관례상 하는 말이고, 솔직히 술은 낮술이 좋지요.”

필우는 꼭 제가 살 것처럼 앞장섰다. 술집으로 옮기면서 필우는 커피가 생각보다 비싸다고 툴툴거렸다. 이것은 ‘내가 커피 샀으니 형님은 술을 사시오.’라는 속내를 비치는 것이다.

필우는 동규에게 물을 것도 없이 소주 한 병과 생두부 한 모를 시켰다. 이제는 맞는 놈이 ‘이렇게 패주소!’ 하는 격이고, 패는 놈이 엮인 꼴이다.

동규가 한 잔을 홀짝거릴 동안에 필우는 한 병을 다 비우고 두 병째를 시켰다. 눈치 안 보고 해물파전까지 한 접시 시키는데 어찌나 당당한지 말릴 수가 없었다.

“형님, 요즘 밤일은 잘 됩니까? 아까 보니 다리도 좋고 허리도 괜찮던데요.”

“밤일? 그런 거 잊은 지 오래야.”

“왜요? 형님은 나이에 비해서 괜찮아 보이던데요.”

“이 사람아. 밤일은…. 그, 뭐… 혼자서 하나?”

“왜 혼자요? 형수님 어디 갔어요?”

“…….”

동규는 얼른 대답을 못 하고 안주만 깨작거렸다.

“아 참, 형수님 아프다고 하던데… 암 수술했다고요?”

“으응. 큰 수술 했어.”

“저런. 형수님 고생이 많겠네요.”

“…….”

필우가 위로라고 한마디 하고는 소주를 한 병 더 시켰다. 동규는 소주를 한 잔 더 마셨다. 당뇨 때문에 술은 거의 안 마시지만, 오늘은 영 마음이 이상하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형님도 힘들겠네요.”

“나야 뭐, 마누라 고생시킨 죄인이라……. 유구무언이지.”

<3>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이 되었다. 화장실에 잠시 다녀온 필우가 이번에는 소주 한 병을 더 시키고 골뱅이 무침까지 시켰다.

본래 입심이 좋은 사람이지만 술을 마시면 말이 더 많아진다. 그리고 표현도 아주 거칠고 강하다. ‘그 사람을 혼내고 싶다’를 ‘그 새끼 콱 쥑이고 말 거야.’로 표현한다. 말에는 세금이 안 붙어서 그런지 겁도 없고 아낌도 없다. 오늘 횡설수설 늘어놓는 필우의 말은 대충 이랬다.

-남자는 금욕 기간이 너무 길면 정신적으로 무척 해롭다, 스트레스가 많고 우울증에 걸릴 확률도 높아진다,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시들해진다, 옛날 왕이 전투에 이긴 장수에게 술과 여자를 상으로 주는 이유가 있다, 영웅호걸은 주색을 즐긴다, 장수는 여자와 엉키면서 다시 에너지를 얻는다, 새벽 발기가 안 되는 남자에게는 돈도 안 빌려준다, 쓰지 않는 기능은 퇴화하기 마련이다, 타조는 날지 않다가 결국은 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꼬리뼈도 쓰지 않으니까 없어진 것이다.―

꽤 길게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동규는 졸음을 참느라 애먹었다.

“형님, 나는요 며칠 그거 안 하면 실수를 자주 해요. 주차하다가 남의 차를 긁거나, 계단 내려가면서 자빠지기도 해요. 몸과 정신의 바란스가 안 맞아요. 그거 진짜로 희한하지요.”

동규는 소주를 한 잔 더 마시면서 생각을 모았다.

‘아, 그런가? 그래서 내가 요즘 자신감이 없고 시들한가?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고? 그래서 요즘은 새벽 발기도 잘 안 될까?’

이제 필우는 거나하게 술이 올랐고 동규도 얼굴이 빨개졌다.

“형님, 나는요… 너무 오래 참으면 이상해지는…….”

“방금 그 말했잖아?”

“아니, 그게 말이지요. 길을 가더라도… 오는 년 가슴만 보이고, 가는 년 엉덩이만 보여요. 다른 건 하나도 안 보여요.”

역시 필우의 입심은 남달랐다. 같은 말이라도 그가 하면 더 실감 나고 재미있게 들렸다. 말이 입에 착착 감기는 것이다.

“오는 년 가슴, 가는 년 엉덩이… 거참, 재미있는 표현이네”

동규가 공감을 나타내니까 필우의 일장 연설은 더 이어졌다.

-변화에 적응해야 산다, 낙타는 사막에서 잘 다니기 위해 다리가 길어졌다, 또 모래바람을 극복하기 위해서 눈썹이 길어졌다, 이런 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변화 노력이다, 형님도 환경에 따라 변해야 한다, 형수님이 몸이 아프면 밖에서라도 해결해야 한다, 그냥 있으면 몸과 마음이 급격히 다운된다,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면 충전도 안 된다.― 등등 길기도 하다.

필우는 몸과 마음을 위해서 마치 섹스가 최고의 방법인 양 주장했다.

“이봐, 필우. 그만 나가자고. 목욕하고 나른한 데다… 소주도 석 잔이나 마셨으니 피곤해.”

“아따, 형님. 누구는 목욕 안 했수? 그리고 술은 내가 거의 다 마셨고……. 그래도 나는 아직 생생하잖아요? 이게 남자의 파워라고요. 형님은 소주 석 잔에 흐물흐물하니까 그만큼 삭았다는 거요.”

“삭았다고? 내가?”

“아, 삭았으니 이렇지요. 아니면 썩었거나.”

필우의 도발적인 힐난에 동규는 정색하고 반격했다.

“그럼, 생생한 자네와 삭은 내가 내일 산에 한 번 가볼까?”

그 말에 필우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젓가락으로 안주만 집적거린다. 필우는 작년에 동규와 함께 산에 갔다가 엄청나게 고생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산에서 펄펄 날듯이 앞장서 걷던 동규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지난번 총동창회 등반대회에서도 동규보다 앞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여튼… 산에는 갈 시간도 없고요, 어쨌거나 형님도 변화를 위한 노력을 좀 해야지 안 그러면…….”

“야! 이게 누구야? 염필우 아닌가? 어, 동규 성님도 계시네.”

바로 그때 김창기가 들어왔다. 형님을 성님이라고 부르는 창기는 체격도 크지만 목소리도 우렁우렁하다. 두주불사의 주량이라 매일 술집 서너 군데를 돌아다니며 마신다.

취하면 아무나 붙들고 싸우기도 잘한다. 특히 정치인이나 공직자의 비리 이야기만 나오면 자제력을 잃고 방방 뜬다. 그뿐 아니라 술만 마시면 마누라를 마구 때린다. 그러다가 재작년에 열 살 아래 처남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이혼까지 당했다.

“어, 창기 왔네. 오늘 형님과 한잔 하는 날이야. 이리 앉아.”

필우는 남이 계산하는 술자리에서는 아무에게나 앉으라고 한다. 게다가 창기는 술만 있으면, 앉으라는 말이 없어도 앉는 사람이다. 동규는 슬그머니 일어서려다가 창기에게 잡혔다.

“성님, 어디 가요?”

“으응, 술도 많이 취하고 좀 피곤해서…….”

“어허, 성님. 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일어서시오? 나한테 무슨 유감이라도 있수?”

동규는 창기에게 잡힌 손목이 얼얼했다.

“그래, 알았으니 이 손목이나 놓게.”

창기가 합세하니까 필우는 술을 더 마셨다. 동규는 하품을 입에 물고 주로 듣는 쪽인데, 두 사람은 죽이 맞아서 떠들어댔다.

“어이, 창기 자넨 요즘 짝도 없이 어떻게 살아? 외롭지는 않아?”

“외롭긴, 술도 많고 여자도 많은데……. 야, 마누라 하나 포기하니까 세상의 술과 여자가 모두 내 꺼야. 필우 자넨 죽었다 깨도 이런 맛을 모를 거야.”

<4>

사실이 그랬다. 창기는 이혼 1년 후에, 그러니까 작년 가을에 흙보다 돌이 많은 뒷산이 공단으로 편입되면서 보상금을 27억이나 받았다. 재수 없는 여편네 나가고 복이 들어왔다고 킬킬 웃었다. 뭉텅이 돈이 생겼으니 술과 여자가 모두 제 것인 양 큰소리 땅땅 치는 거였다. 그래도 누가 창기에게 술 얻어먹었다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취기가 오른 두 사람은 성매매방지특별법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했다. 다른 손님은 안중에도 없이 주거니 받거니 떠드는 이야기는 만리장성처럼 길었다.

―어떤 경찰서장년이 앞장서서 성매매방지특별법을 만들었는데 이게 천하의 악법이야, 윤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었지, 윤락은 여성의 생존을 위한 하나이 직업이라고, 다만 납치, 구금, 강박 등으로 이루어지는 윤락은 안 돼, 그건 인신매매이며 인격탄압이거든, 또 미성년자도 안 돼. 하지만 성인 여성이 자유의사로 선택했다면 그 선택은 존중해줘야 해, 그 일을 못 하면 굶어 죽는다고, 솔직히 세상의 모든 마누라도 남편에게 매춘하는 거 맞잖아, 정부에서 윤락을 막으니까 돌출구를 못 찾는 남자가 아무에게나 성추행을 하지, 심지어 대통령을 수행해서 외국에 나간 놈도 젊은 년 집적거리다가 개망신당하고 잘렸잖아, 너무 막으면 안 돼, 자꾸 막으니까 어린이 성폭행도 일어난다고, 요즘 뉴스에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가, 성욕은 아주 자연스러운 본능이야, 식욕과 수면욕과 함께 3대 욕구야, 꼴리는 사람은 해야 한다고, 그걸 막는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뺏는 인권탈취야. 이것은 국가가 국민에게 꼬장 부리는 거야.―

“그래서 결론은! 성매매방지특별법은 없애야 한다고.”

“맞아. 누가 그걸 공약하고 대통령 나오면 난 무조건 찍어줄 거야.”

필우가 큰 목소리로 주장하고 창기도 화끈하게 동의했다.

띠리링 띠리링.

졸고 있던 동규는 휴대폰의 신호음에 깼다. 어디 있느냐, 왜 아직 안 오느냐를 따지는 명애의 음성이 차갑다. 동규는 곧 간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럴 때 휴대폰은 자유를 속박하는 족쇄다.

늦게 합류한 창기와 떠들던 필우는 젓가락을 탁 놓더니 동규를 쳐다본다.

“그러니까… 형님도 형수님 건강이 그러시면 밖에서 간혹 여자를 만나요.”

“밖에서 여자를? 에이, 난 그런 거 못 해.”

“아, 왜요? 허리 다리 힘도 좋겠다, 아직 5학년이면 얼마든지…….”

“5학년이라니? 나 올해 환갑이야.”

동규가 마치 잠을 털어내기라도 하듯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아, 그러니까 5학년 11반이잖아요? 요새 그 나이면 청년이지, 뭐.”

“허, 5학년 11반이라니. 거참 편리한 계산이네. 그럼 난 4학년 17반이네.”

창기가 필우에게 한 수 배웠다며 킬킬 웃었다.

“어쨌거나 형님은 4학년 같은 6학년인데, 까짓것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잖아요?”

필우의 말은, 법의 문제점부터 윤락녀의 직업 선택권에다 나이 타령까지 초점이 약간 꼬였지만 결론은 확실했다.

“형님, 쓰지 않는 신체는 퇴화합니다. 정신적 신체적 건강도 생각해야지요. 그러니 밖에서 여자를 한 번씩 만나고 집에 가서 형수님께 인간적으로 잘해주면 돼요.”

“됐어, 그만해. 그것도 하는 사람이나 하지 난 못 해. 아니 안 해.”

“아, 왜요? 돈 얼마 아니면 되는데…….”

“돈보다, 난 애정이 없는 섹스는 못 해.”

담배 피우러 나가려던 창기가 눈을 부릅뜨며 걸걸하게 말했다.

“아따, 성님. 무슨 애정까지나……. 섹스는 그냥 스포츠 정도로 생각하라고요. 나는 그걸 못 하면 변비 걸린 놈처럼 갑갑해요. 그냥 시원하게 배설하는 것이지 애정은 뭐 말라죽은 애정이우?”

“아, 그래. 좋으면 자네들이나 실컷 하라고. 난 싫으니까.”

동규는 이제 그 이야기를 그만하고 싶었다. 그때였다. 동규의 휴대폰에 문자가 들어온 것이다.

<민동규 씨. 얼굴 한 번 봅시다. 옛 친구 배순지>

동규는 생각했다. 옛 친구 배순지. 맞아, 옛 친구였지. 부잣집 딸인 데다 독선적인 여자였지. 데이트 약속도 마음대로 바꾸고 모든 결정을 자기가 다 했지. 예쁘지는 않았지만 제법 귀여운 여자였어. 그런데 지금 얼굴 한번 보자고? 그래, 맞아. 10년 전에도 ‘얼굴이나 보자’는 전화가 왔었어. 그때는 잠깐 만났었지. 진주 촉석루 근처의 작은 찻집이었지. 찻집 이름은 기억이 안 나고 마당에 패랭이꽃이 많았던 게 기억나는군.

“형님, 무슨 생각해요? 문자 한 통 받더니 왜 그리 심각해요?”

필우가 탁자에 놓인 동규의 휴대폰을 슬쩍 보면서 말했다.

“왜요? 애인이 보냈어요?”

“아니… 애인이 어딨 어?”

동규가 티슈로 입 언저리를 닦을 때 명애의 전화가 또 왔다.

“아, 지금 몇 신데 아직 안 들어와요? 어디 있어요, 지금?”

“으응, 아까 그 후배들이랑 술 한잔하느라고…….”

“지금 밤 11시가 넘었는데 안 들어올 거예요?”

명애의 짜증 섞인 음성이 필우에게도 들렸다. 필우는 창기에게 쉿! 하더니 양손 검지를 관자놀이 옆에 뿔처럼 세웠다. 동규는 집을 너무 오래 비웠다고 생각하며 일어섰다.

“어이, 나 먼저 갈게. 이거 술값에 보태라구.”

동규는 5만 원권 지폐 한 장을 테이블에 놓고 나왔다. 물귀신 같은 창기도 더는 붙잡지 않았다. 필우는 지폐를 주머니에 슬그머니 넣었다. 술값은 돈 많은 창기에게 넘길 심산인데, 이건 하나님도 눈치 못 채기를 바랐다.

<5>

집에 오니 예상대로 명애의 짜증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4시에 목욕 간 사람이 7시간이나 지나서 오는 이유가 뭐냐며 닦달했다. 동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명애는 침대에 오래 누워있으므로 어깨와 등을 자주 주물러줘야 한다.

동규는 명애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10년 전 순지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동규 씨. 우리 스무 살 때 거제도로 캠핑 갔었잖아? 그때 함께 잠을 자면서도 손만 잡고 잤지? 왜 주는데도 못 먹었어?”

“그땐 아낀다고 안 먹었어.”

“치, 고마워 죽겠네. 그럼 서른다섯 살 때는 같이 술도 마셨는데 왜 안 먹었어?”

“내 꺼 아니니까 못 먹었지.”

“흥, 도덕 선생 났구먼.”

“난 몽당연필 한 개라도 내 꺼 아니면 안 쳐다봐.”

“그럼 오늘은? …… 이제 우리 오십 넘었어. 파란만장한 인생살이 반백 년 지난 기념으로 어디 좋은 데 갈까?”

순지가 동규를 놀리듯이 물었다.

“안 돼.”

“왜?”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야. 첫물에는 아낀다고, 한물에는 내 꺼 아니라서, 그리고 끝물에는…….”

“끝물에는? 계속해봐.”

“끝물에는, …… 화내지 마. 맛이 없을 거 같아 먹기 싫어.”

“야, 민동규! 그 말 취소 못 해?”

“하하하. 알았어, 취소할게. 그런데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안 되는 거야.”

“동규 씨, 정말 대단해. 그러니까 옛날부터 내가 그랬지. 동규 씨는 대꽁이라고. 대책 없는 꽁생원!”

동규가 명애의 안마를 마칠 무렵에 문자 신호음이 들렸다. 옛 생각도 끝났다.

<동규 씨. 왜 대답이 없어? 난 기다리고 있는데. 순지>

동규는 뜨끔해서 휴대폰을 얼른 바지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방금 생각하던 10년 전의 대화를 들킨 것처럼 놀랐다. 명애가 졸리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

“문자 어디서 온 거예요? 자정이 다 지나서…….”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스팸이지, 뭐.”

동규는 급한 대로 둘러대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날 아침에 터졌다. 동규가 세수하고 나오니까 명애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날아왔다.

“스팸이라고요? -동규 씨. 왜 대답이 없어? 난 기다리고 있는데. 순지- 아니, 이런 스팸도 있나요? 민동규 씨.”

명애는 바로 윗줄의 문자도 읽었다.

“뭐라? -민동규 씨, 얼굴 한 번 봅시다. 옛 친구 배순지- 하 참! 가관이야. 목욕탕에 가서 7시간 걸린 이유가 이거였네. 그래, 옛 친구 만났는데 겨우 7시간밖에 안 놀았어요? 아주 밤을 지새우지 그랬어요?”

“아니, 그건 아니고… 어제는 정말 필우랑 창기하고…….”

“아이고, 됐네요. 얼른 아침 먹고 나가 봐요. 순지 씨 눈 빠지기 전에.”

“저, 그건 오해야. 그 여자 옛날부터 날 좋아했는데… 그렇지, 혼자 짝사랑을 해서…….”

“하이고, 그러세요? 짝사랑까지나 하는 여자도 있었네요. 행복하시겠어요.”

동규는 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침도 안 먹고 나왔다. 허탈하고 가슴에 먼지가 팍팍 일어나는 기분이다. 김밥 두 줄과 컵라면 한 개를 사서 작업실로 갔다.

<6>

15년 전부터 익힌 서각이 요즘은 제법 용돈 벌이할 만큼 주문이 들어온다. 아침을 대충 때우고 끌을 갈면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순지의 문자를 삭제하지 않았던 걸 후회했다. 그때 전화가 왔다.

“형님, 지금 어디 있어요?”

필우 전화다. 별로 만나고 싶은 기분은 아니지만 피할 명분도 마땅찮다.

“응, 작업실이야.”

잠시 후에 필우가 왔다. 어젯밤에 그렇게 마시고도 말짱해 보인다. 역시 타고난 술꾼이다.

“형님. 요 앞에 콩나물 해장국 먹으러 가십시다. 속 풀어야지요.”

“해장국? 나 금방 아침 먹었는데……. 김밥이랑 컵라면으로.”

“허허 참. 아침부터 컵라면이라니, 형수님한테 쫓겨났어요?”

동규는 필우의 말에 딱히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제 발로 나왔지만 쫓겨난 것이나 진배없었으니.

“형님. 어제 내 말 생각해 봤어요?”

“무슨 말?”

“우리 형님, 또오 또 저러신다. 아, 밖에서 여자를 한 번씩 만나라니까요.”

“…….”

필우는 동규의 침묵을 동의 쪽으로 기운다고 판단했는지 계속 열을 올렸다.

“형님, 성 욕구 해소는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밖에서 운동했다 생각하고 집에 가서 형수님께 지극정성으로 잘해주면 되잖아요.”

사실 필우가 이렇게 강력한 권유를 하는 것은 꿍꿍이가 있다. 필우는 밖에서 여자를 만나는데 혼자 싸돌아다니니까 마누라에게 알리바이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동규와 다니면 알리바이가 해결된다고 믿었다. 동규는 처신이 반듯하고 생활이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필우 아내도 인정하니까 말이다.

“형님, 그러지 말고 확 저질러버리면 됩니다. 너무 금욕하면 해롭다니까요.”

“…….”

“내가 여자 하나 소개해줘요?”

“아니, 일없어. 자네나 많이 저질러.”

필우가 답답하다며 제 가슴을 퍽퍽 쳤지만 동규는 요지부동이었다. 필우가 긁힌 레코드판처럼 했던 말을 재탕 삼 탕 할 때 동규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봐요, 민동규 씨. 문자를 두 번이나 보냈으면 답이 있어야지, 귀부인이 그렇게 연락했는데 신사 매너가 그게 뭐야.”

“…….”

“여보세요, 여보세요! 끊지 마!”

순지의 급한 음성이 필우의 귀를 당겼다.

“그래, 왜? 나 지금 바빠!”

동규는 제 귀에도 무뚝뚝하게 들릴 정도로 말했다.

“어이, 대꽁!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잖아? 시간 잡아 봐. 내가 밥 살 테니까.”

“글쎄, 다음에 봐. 나중에 내가 연락할 테니 문자도 보내지 마. 끊어.”

전화를 끊어버린 동규는 커피를 두 잔 타서 필우와 마주 앉았다.

“형님, 누군데요? 너무 야박하게 끊던데요. 무슨 악연이라도 있습니까?”

“그냥… 별거 아니야. 저 혼자 저러지. 잊을 만하면 연락 오는 사람, 옛날에 조금 알고 지냈는데 나 하고는 안 맞아.”

“형님, 저런 여자는요, 만나는 즉시 해결이 돼요.”

“해결은 무슨……. 제 마음대로 하는 여자야. 내 취향도 아니고.”

“형님 취향이 뭔데요? 아하, 옛날부터 좋아하던 청순가련형? 꿈 깨시우. 환갑 나이에 청순가련형이라니.”

필우는 빈정대는 눈빛으로 동규를 쳐다보다가 2인조 외도를 계속 권했다.

<7>

띠리링 띠리링. 또 전화벨이 울렸다. 동규는 짜증이 나서 전화기를 거칠게 잡았다. 아, 그런데 액정에 찍힌 발신인은 ‘마눌님’이었다.

“여보, 어디 있어요? 아침은요?”

“작업실. 아침은 대충 먹었고…….”

“지금 내가 나갈까요? 당신 좋아하는 돼지국밥이나 먹으러 가죠, 뭐.”

이렇게 나오는 건 화해를 바란다는 신호다. 명애는 수술 이후부터 짜증만큼이나 변덕도 심하다.

“아니, 나중에 내가 전화할게. 주문받은 문패가 좀 급해. 끊어.”

동규는 아침의 그 소동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 난 듯이 휴대폰의 최근 통화와 메시지 정보에서 배순지의 이름을 삭제했다. 이런 거 남아 있으면 또 꼬투리 잡힌다고 생각하니 휴대폰도 흉기처럼 보인다.

동규는 필우가 나간 후에 끌을 계속 갈았다. 그런데 그만 삐끗해서 손가락을 베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이런 일이 가끔 일어난다. 특히 마음이 심란하고 잡념이 많을 때는 무슨 응징처럼 칼에게 당한다. 구급약품으로 대충 치료하고 작업실을 나와 버렸다. 욱신거리는 손가락도 그렇지만 이런 날은 작업도 잘 안 된다. 동규는 안 될 때는 안 하는 게 상책이라는 경험법칙에 충실한 편이다.

시립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책에도 집중되지 않았다.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창 쪽 자리에 앉아 독서 반 졸음 반으로 비몽사몽이었다. 어제 마셨던 술 탓인지 책장에 침까지 흘리며 졸았다. 무력감이 스멀스멀 밀려와서 책을 덮고 나왔다.

집에 오니 명애가 도끼눈으로 노려보았다.

“흥! 문패가 급하다고? 나중에 전화한다고?”

“…….”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가 안 와서 작업실에 갔더니…….”

“아, 왔었어?”

“그래요. 문 잠가 놓고 배순지 만나러 갔나요?”

“아니, 그게…… 도서관에 가서…….”

졸다가 왔다는 말을 하려는데 명애가 잘라버렸다.

“전화는 왜 안 받았어요?”

“어, 전화? 도서관에서 진동으로 돌려놓고…… 잠깐 졸다가…….”

“그만둬요. 요샌 아주 거짓말 선수가 다 됐네요.”

“거짓말이 아니고…….”

“됐네요. 들통 안 나게 거짓말 연습이나 부지런히 해요.”

요즘 명애는 화날 때 상대의 말을 끝까지 안 듣고 잘라버리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이럴 때 동규가 입을 닫아버리는 것도 새로운 습관으로 굳어졌다.

<8>

지루한 장마가 7월 말까지 찔끔거리더니 8월이 되면서 꼬리를 감추었다. 날씨가 너무 덥다. 이런 날은 집보다 작업실이 낫다.

동규는 작업실 창문을 모두 열고 라디오를 크게 틀었다. 갈수록 볼륨을 높이는 것도 나이 탓이겠지 하며 손걸레를 두 번이나 빨아서 말끔하게 청소를 했다. 작업실이 넓어서 좋지만, 청소 시간이 길어지는 건 피곤한 일이다.

친구 오상태가 작업실 근처에 왔다면서 전화를 했다. 그는 동규와 가장 가까운 친구다. 그는 은행 지점장으로 퇴직하고 부인과 여행도 다니면서 다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동규는 낯가림이 심해서 대인 관계가 넓지 않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해서 아무나 얼른 사귀지 못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면 확실히 좋아한다.

“친구, 뭐 하나? 어, 청소했네.”

“으응, 어서 와. 장마 끝에 하도 지저분해서…….”

“이 사람, 내가 올 줄 알고 깨끗한 척했구먼. 하하.”

“글쎄, 텔레파시가 통했나?”

상태는 지인의 부탁으로 서각을 주문했다. 윤동주의 서시를 양각으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좀 피곤해 보이네.”

“어, 조금…….”

“부인 간병하느라 힘들지? 고생 많겠네.”

“고생은 뭐……. 자업자득이지.”

“자업자득?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마누라 고생시켜서 병 생겼거든.”

이것은 진심이다. 평소에도 동규는 그런 자책감을 자주 느끼고 있다. 아내가 아픈 이후로 처제와 처남들 만나기가 무척 불편하다.

“야, 야!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자네만큼 성실한 남편이 어디 있나? 남자들이 마누라 애먹이는 것은 대체로 서너 가지야. 술, 도박, 마약, 외도 등이지. 자넨 그런 짓을 일절 안 하잖아? 그러니까 참 괜찮은 남편이지.”

“괜찮긴 뭐가 괜찮아? 가난하고 능력 없는데.”

“그렇다고 밥 굶어? 애들도 잘 키웠고 그만하면 괜찮아. 성격이 좀 까다롭지만 요즘은 나이 들면서 많이 부드러워졌어. 부인에게 계속 잘해줘. 착한 사람인데 얼마나 힘들겠어?”

동규는 상태의 말에 콧등이 시쿰해졌다.

“그리고 말이야, 며칠 후에 동창회 있지? 이번엔 꼭 참석해. 이젠 애들 결혼도 시켜야 하니까 자주 얼굴 비치는 게 좋아.”

“으응, 그러지 뭐.”

동규는 말로만 동의했지 갈 생각이 없었다. 별로 안 친한 사람이 친한 척하는 게 귀찮고 도무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술 취해서 떠드는 인간들 쳐다보는 것도 질색이다. 그때 가서 적당한 핑곌 만들어 빠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상태가 뜻밖의 말을 했다.

“그저께 장현희 전화받았어. 동창회에 자네 데리고 나오래.”

순간 동규는 가슴에 쿵 소리가 들리도록 놀랐다. 장현희.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첫사랑이다. 순지보다 먼저 만난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 여자였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누군가 첫사랑은 무지개라고 했다. 아름답지만 빨리 사라지는 게 그렇단다. 동규는 장현희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현희와 따로 대화를 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감까지 은근히 생겼다.

<9>

동규는 동창들과 대충 인사를 나누고 한쪽 귀퉁이에 앉았다. 대각선으로 건너편 자리에 현희가 보였다. 현희는 눈인사를 하더니 소주병을 들고 이쪽으로 왔다.

“동규 씨, 오랜만이야. 내 술 한 잔 받아.”

많이 변했다. 벌써 술에 취했는지 목소리도 크고 행동도 거침없었다. 동규는 받은 술잔을 내려놓고 다른 잔에 술을 따르려고 했다.

“아니, 싫어. 그 술부터 마시고 한 잔 줘. 원샷!”

동규는 현희의 말대로 받은 술을 단숨에 마셨다. 요즘은 소주가 별로 쓰지 않다. 옛날처럼 캬 소리를 내면 오버액션이다. 동규가 그 잔을 현희에게 돌려주고 술을 따르는데 어떤 동창이 킬킬거리며 놀렸다.

“야, 그림 좋다. 친구는 옛 친구요 사랑은 첫사랑이어라!”

동창들은 와! 하고 환호를 지르거나 두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비틀며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현희가 물었다.

“어떻게 살았어? 많이 늙었네.”

“늙을 때도 됐지, 뭐. … 근데 나만 늙었나?”

동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자신이 제일 늙어 보인다 싶어 씁쓸했다.

현희는 나중에 따로 잠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다른 자리로 옮겼다. 그런데 현희는 술병과 잔 하나를 들고 남자들만 찾아다닌다. 저렇게 한 잔 주고 한 잔 마시면 너무 많은데 싶어 동규는 걱정스러웠다.

잠시 후, 총무가 경과보고를 할 때였다. 동규는 현희의 행동을 보고 깜짝 놀랐다. 현희가 다른 남자의 허벅지에 걸터앉아서 깔깔 웃는 것이 아닌가. 동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 저 여자가 정말 장현희 맞나? 그렇게 얌전하고 차분하던 여자가 왜 저렇게 변했을까? 역겨운 행동이다. 더 보기 싫어서 밖으로 나와 버렸다.

동규가 식당 바깥의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실 때 상태가 옆에 와서 묻는다.

“놀랐지? 장현희 행동. 아마 너 보라고 일부러…….”

“그만해. 나 저런 여자 관심 없어. 술을 먹든 쥐약을 먹든.”

“…… 커피 얼른 마시고 들어가자.”

“아니, 나 갈 거야. 작업실에 일이 많아. 여기서 낭비할 시간이 아까워.”

동규는 상태에게 동창회비를 맡기고 나와 버렸다. 식당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택시도 잘 안 잡혔다. 공연히 화가 나고 누구라도 패주고 싶었다. 기분이 정말 고약하다. 흔든 놈에게 피박까지 쓴 기분이다. 앞으로는 동창회에 절대로 참석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10>

작업실의 라디오를 크게 틀었다. 마침 나훈아의 ‘애정이 꽃피던 시절’이 흘러나왔다. 첫사랑 만나던 그날 얼굴을 붉히면서 철없이 매달리며 춤추던 사랑의 시절……. 동규는 낮은 소리로 따라 부르면서 노랫말을 생각했다.

띠리링 띠리링.

휴대폰에 생소한 번호가 떴다. 누굴까?

“여보세요.”

“어이, 동규 씨. 어디야? 왜 도망갔어?”

장현희다. 많이 취했는지 말소리가 꼬인다.

“…….”

“내가 말이야, 자기 보고 싶어서 왔는데…….”

“끊어. 나 지금 바빠.”

동규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조금 후에 다시 벨이 울렸지만 받지 않고 무음으로 돌려버렸다. 작업도 잘되지 않았다. 글자의 획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이런 날은 실수도 잦다. 커피를 한 잔 마셨다. 가까운 보두산에나 가려고 나서는데 필우가 들어왔다.

“형님. 왜 전화를 안 받아요?”

“으응. 그냥… 작업할 때는 무음으로 돌리거든.”

필우는 제 손으로 믹스 커피를 타서 자리에 앉았다.

“형님. 내가 형님 생각해서 좋은 여자 하나 골랐는데요…….”

“좋은 여자 골랐으면 자네가 데리고 놀아.”

동규가 평소와는 달리 좀 쌀쌀맞게 말했지만, 필우는 줄기차게 너스레를 떨었다.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도 보여주려고 했지만 동규는 외면했다. 필우는 어딘가로 전화하더니 작업실의 위치를 설명했다. 그리곤 여자가 이리 오고 있다면서 특유의 입심으로 말을 이었다.

“형님처럼 그렇게 살면 빨리 늙어요. 옛날의 권력가들은 회춘 비법으로 젊은 여자를 가까이했잖아요. 즐기면서 살아도 짧은 인생인데 그게 뭡니까? 참 답답한 양반이네요. 제발 좀 솔직하게 삽시다. 그래, 형님이 애인 하나 만든다고 세상이 뒤집혀요? 형수님도 이해할 거요. 아니 나하고 다니면 안 들켜요. 알리바이가 확실하니까……”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에, 들어오세요.”

필우는 마치 주인인 양 크게 응답했다. 동규는 들어오는 여자를 보지도 않은 채 테이블 위의 신문과 밀감 껍질 따위를 치웠다.

“실례해요.”

“아, 빨리 왔네요.”

“바로 요 근처에서 전화받았거든요.”

필우가 여자에게 자리를 권하면서 동규에게 눈짓을 보냈다. 뚱하게 서 있지 말고 인사라도 하라는 눈치 같다.

여자를 흘깃 바라본 동규는 깜짝 놀랐다. 상당히 미인이다. 나이는 마흔이 조금 넘었을까? 어쩌면 30대 후반일지도 모른다. 요즘 사람들은, 특히 여자는 나이 짐작이 어려우니까 말이다.

아담한 체형에 발랄한 표정과 밝은 음성이다. 큰 눈과 볼우물이 참 예쁘다. 필우가 양쪽을 소개하고 그녀에게 커피와 밀감을 권했다. 필우는 동규의 긴장한 표정을 보고 실실 웃었다. 동규와 양소영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틀 후에 만나 저녁을 먹었고, 또 사흘 후에는 호프에서 맥주도 마셨다.

“민 선생님, 다음에는 영화 보러 가요.”

“영화요? 저… 나는 영화를…….”

“제가 이미 표 두 장을 구했으니 함께 가요.”

동규는 영화에 별로 취미가 없다는 말은 굳이 안 했다. 양소영이 마음에 드니까 영화관에서 졸더라도 함께 있고 싶었다. 동규는 처음 연애하는 총각처럼 가슴이 쿵쿵 뛰었다. 다음 약속 날이 무척 멀리 느껴졌다.

집에서 별로 말이 없던 동규가 요즘에는 부쩍 말수가 많아졌다. 전기면도기로 턱을 문지르면서도 콧노래를 흥얼거리거나, 거울 앞에서 입꼬리를 슬쩍 올리기도 했다. 잠깐이라도 틈이 생기면 양소영의 애교를 떠올렸다.

약속 날 오후 늦게 동규는 말도 안 하고 집을 나섰다. 아내에게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소영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까지 누르지는 못했다. 두 사람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와인도 두 잔씩 마셨다. 그리고 바로 옆의 영화관에 들어갔다.

동규는 영화 제목도 모르겠고 내용에 집중되지도 않았다. 외국 영화인데 자막도 거의 읽을 수 없었다. 옆에 앉은 소영의 존재에 온통 정신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소영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향수 내음으로 동규는 약간의 현기증까지 느꼈다.

동규는 영화관의 은밀한 어둠 속에서 소영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런데 손바닥에 땀이 너무 많이 나서 망설여졌다. 요즘은 손에 땀이 전혀 안 났는데 지금은 무슨 땀이 이렇게 많이 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영화 속 남녀의 키스 장면을 보는 동규는 저절로 몸이 꼬였다. 설레고 당황하고 용기 없는 자신을 느끼는 동안에 영화는 끝이 났다.

“민 선생님, 영화 재밌죠?”

“어, 네? …… 아, 네.”

“어디 가서 술 한잔하실래요?”

“네? 술요? …… 그러지요, 뭐.”

술을 조금 마시면 용기가 생기고, 어쩌면 더 좋은 시간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 동규가 들뜬 마음을 달래느라 심호흡을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 어디예요? 말도 안 하고 언제 나갔어요?”

“어, 으응. 그냥, 밖에 좀…… 지금 들어갈 거야.”

거짓말이란 미리 준비한 말이 없으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손바닥에 땀이 많이 난다. 이러면 안 된다. 들통나기 전에 얼른 들어가야 한다. 동규는 집에 손님이 왔다면서 소영에게 양해를 구했다. 소영이 샐쭉해졌지만 어쩔 수 없다. 요즘은 조금만 눈에 보이지 않으면 명애가 날카로워진다. 이래서 필우가 2인조 외도를 권했구나 싶었다.

<11>

동규는 수요일에 상태를 만났다. 제일 믿고 의논할 수 있는 친구라서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고 싶었다.

“그래, 의논할 일이 뭐야?”

“응. 사실은 내가 여자를 하나 만나는데…….”

동규는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좋다는 것도 말했다. 상태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동규야. 그 여자 몇 살이야?”

“마흔둘.”

“가족은? 남편은?”

“혼자 산대. 2년 전에 이혼하고.”

“40대 초반의 미인, 볼우물도 예쁘고 연한 배처럼 물기 촉촉한 여자, 게다가 싱글, 그런 여자가 머리 허연 꼰대를 좋아한다고?”

“…….”

“혹시 꽃뱀 아닐까? …… 조심해. 아니, 조심보다 아예 시작을 하지 마.”

“상태야. 그런데 그게 말이야, 나 그 여자…… 진짜 좋아해. 매일 보고 싶다고. 머리 허연 꼰대지만 요새 노래처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딱! 그만해. 내가 보기엔 자네가 상처를 많이 받을 거 같아. 요즘 젊은것들이 어떤 줄 알아? 물질 앞에 진정한 사랑 따윈 없어.”

“하지만 소영이는…….”

“여자가 먼저 접근해서 모텔로 가면 젊은 남자가 쳐들어와 난리를 치지. 꼼짝없이 봉변당하고 돈 뺏기고 하는 거 TV에 자주 나오잖아? 못 봤어?”

“…….”

“말이라서 그렇지 실제로 당해봐. 세상에 그렇게 쪽 팔리는 일이 또 있겠어?”

동규는 힘이 쭉 빠졌다. 애초에 상태의 허락이나 동의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친구에게 허락받고 바람피우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래도 이런 말을 듣고 보니 계속 진행하기가 겁난다.

“그리고 동규 자네도 좀 생각해 봐. 명애 씨가 저렇게 아파서 고생하는데 남편이란 사람은 어디에다 정신 팔고 있는 거야? 그게 말이나 되느냐고!”

“…….”

동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한숨만 푹 쉬었다.

“하여간 자네가 얼른 끝내지 않으면 내가 그냥 안 있을 거야. 명애 씨에게 알리고 자네 애들에게도 말할 거니까……. 알아서 해.”

상태의 만류는 아주 강경했다. 그라면 충분히 이런 경고를 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리고 말로만 겁주는 게 아니고 행동으로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다.

<12>

금요일 오후에 필우가 작업실로 왔다. 실실 웃는 게 뭔가 꿍심이 있어 보였다.

“형님. 소영 씨와 친구가 내일 같이 놀러 가재요. 네 명이 백양산 단풍놀이나 가지요, 뭐.”

“백양산? 전라도까지?”

“예. 시간 봐서 1박 해도 괜찮고요.”

“…….”

동규가 망설이는 눈치를 보이자 필우의 끈질긴 설득이 계속되었다.

“형님. 세상일이란 너무 어렵게 생각하면 자꾸 꼬여요. 그냥 적당한 선에서 확 저질러야…….”

“좋아, 가자고! 까짓것, 하루 늦게 났다 치지 뭐.”

동규가 평소와 달리 과감한 태도를 보인 것은 1박을 할 수도 있다는 말에 묘한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끝장을 보겠다는 결의까지 다졌다.

다음날 네 사람은 필우 차를 타고 떠났다. 차 안에서는 필우의 걸쭉한 입담으로 야한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여자들은 까르르까르르 웃었지만 동규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깊은 생각에 빠졌다. 상태의 강력한 경고도 생각났지만, 젊고 귀여운 소영을 포기하기란 어려웠다. 갈등은 자꾸만 커졌다.

백양산 입구부터는 끝없는 자동차 행렬과 단풍의 바다에 빠져버렸다. 겨우 주차하고 한식당으로 들어갔다. 네 사람은 더덕구이 정식과 동동주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두 사람씩 나누어 산책을 나섰다.

동규와 소영은 숲길을 걸었다. 소영이 동규의 팔짱을 끼었는데 멀리서 보는 필우 눈에는 애교 많은 딸처럼 보였다. 동규는 소영의 화장품 냄새에 가슴이 뛰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두근거림이 낯설기도 했지만 좋았다.

짙은 단풍 빛깔에다 동동주까지 마셨으니 동규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 다른 사람들이 자꾸 보는 것 같아 쑥스러워진 동규가 앞장서서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구석진 자리에 앉은 동규는 필우 말처럼 첫 줄 첫 칸에 쓰인 아메리카노를 시켰고 소영은 카푸치노를 시켰다.

“민 선생님. 지난번에 제가 공인중개사라고 말씀드렸죠?”

소영이 불쑥 말하고 동규는 머리를 갸웃했다. ‘어? 그런 말 했던가? 언제? 나는 처음 듣는데?’ 동규는 약간의 의문과 당혹감을 느꼈다.

소영은 바짝 당겨 앉더니 스마트폰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게요, 8억인데 지금 잡으면 6개월 이내에 3억 정도 벌어요. 이거 확실한 물껀이니까 꼭 잡으세요.”

동규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생각을 했다. ‘아! 이 여자가 이제 보니 나를 이용해서 부동산을……. 딱 잘라야지, 까딱하면…….’

“민 선생님. 저를 믿고 잡아보세요. 절대로 후회 안 하실 거예요.”

“소영 씨. 나 그런 돈 없어요.”

“어머, 그러세요? 그럼 이 물껀은 그렇다 치고…….”

스마트폰에서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던 소영이가 다른 사진을 골랐다.

“이건요, 4억이면 잡을 수 있는데 진짜 아까운 물껀이거든요. 보세요.”

소영이 동규의 코앞까지 스마트폰을 갖다 대며 더 당겨 앉았다.

“확실한 거나 아까운 거나 나는 못 사요. 돈이 없어서…….”

소영은 아예 자리를 옮겨 찰싹 붙어 앉았다. 그리고 팔짱을 끼며 말했다.

“민 선생님. 사실 제가 이 물껀을 사고 싶은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요. 1억만 빌려주시면 6개월 후에 이자 3천을 얹어서 깔끔하게 돌려드릴게요.”

동규는 소영의 화장품 냄새로 가슴이 뛰었지만 긴장을 풀지는 않았다.

“소영 씨, 나는 이런 이야기 싫어요. 솔직히 부동산 투기에는 관심도 없고 능력도 없어요.”

동규가 굳은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하니 소영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

“어머, 민 선생님. 이건 투기가 아니고 투자라고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섭섭해요, 정말.”

“글쎄, 투자든 투기든 부동산과 얽히기 싫어요. 나는 어디까지나 단풍놀이를…….”

“이봐요, 백발 아저씨! 그 정도 능력도 없이 젊은 여자에게 침 흘려요? 세상에, 욕심도 많으시지.”

소영은 신경질적으로 필우에게 전화했다.

“염 사장님, 어디 계세요? 나 집에 데려줘요”

“벌써요? 아니, 왜요?”

“이 아저씨랑 같이 못 놀겠어요. 지금 주차장으로 오세요.”

돌아오는 길에 필우의 운전은 거칠었고, 일행은 모두 입을 다문 채 라디오만 떠들었다.

<13>

며칠 후에 상태가 작업실로 왔다. 동규가 짜장면 두 그릇을 시켜놓고 말했다.

“전에 말하던 그 여자, 그냥 끝냈어.”

“아, 그래? 잘했네. 그런데 어째 쉽게 끝냈구먼. 아주 푹 빠졌던데 말이야.”

“그 여자, 알고 보니 부동산 투기에 날 끌어들이려고…….”

“복부인이야?”

“으응. 뭐 공인중개사라고 하면서… 돈을 투자하라기에…… 끝냈어.”

동규는 무심한 표정으로 백양산의 일을 말했고 상태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것 보라구. 젊은 여자가 우리 같은 사람에게 접근할 때는 뭔가 있다구. 조심해야지. 늘그막에 망신당하지 않게 말이야.”

“처음부터 그런 목적을 갖고 나를 만났던 모양이야. 중개인이라는 말도 처음엔 없었는데, 했다고 우기고…….”

“됐어, 잊어버려. 골목에서 개한테 물렸다 치고.”

“물리기 전에 내가 피했잖아.”

“그래, 맞네. 그 정도에서 끝냈으니 그나마 다행이야.”

두 친구는 짜장면을 맛있게 먹었다. 마음이 편해야 음식 맛도 좋다면서 마주 보고 웃었다.

백양산 이후로 필우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오늘은 뜬금없이 창기가 왔다.

“성님. 지나가다가 들어왔어요. 잘 지내요?”

“으응… 그냥 그렇지, 뭐.”

창기는 서각 작품을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본론을 말했다.

“성님. 나도 이거 좀 배우면 안 돼요?”

“서각을?”

“예, 이거 재밌겠네요.”

창기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끌과 망치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권하고 싶지 않아. 다른 취미를 찾아봐.”

“왜요?”

“이거 하면 맨 먼저 손목에 문제가 생겨. 작품 하나에 끌질을 수백 수천 번씩 하는데, 한 작품 끝내면 침이나 물리치료를 받아야 해. 나이 들면 그냥 있어도 관절이 약해지는데 망치질까지 많이 하니까 당연하지. 게다가 엔진 톱, 전기 대패, 그라인더, 샌딩페이퍼 같은 공구는 고속회전이라서 위험하고 먼지도 엄청 마시거든.”

“그럼 뭐 하면 좋을까요? 술 담배 끊고 나서는 심심해 죽겠는데요.”

“뭐? 술 담배 다 끊었다고? 정말이야?”

“예. 벌써 5개월 넘었어요. 간이 엉망이라고 의사가 어찌나 겁을 주던지…….”

“맞아, 간이 안 좋으면 술 담배 모두 끊어야지.”

동규는 창기의 꺼칠한 낯빛과 작아진 목소리를 살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여자도 재미없고……. 있는 돈이나 다 쓰고 죽어야지요.”

“죽긴 왜 죽어? 아직 괜찮아, 이 사람아.”

동규는 창기를 진심으로 돕고 싶었다. 어딘가에 집중할 수 있는 취미생활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나야 이미 배운 도둑질이라 나무를 깎지만, 새로 시작할 사람에겐 생활도자기를 권하고 싶어. 나이 들면 흙 주무르고 손 많이 쓰는 게 좋아. 또 젖은 흙을 만지니까 먼지도 없어. 날카로운 끌이나 전동 공구를 안 쓰니까 위험성도 없거든. 직접 만든 막사발이나 머그잔 같은 소품은 선물하기도 좋지.”

“성님이 추천하는 거니까 당장 시작하지요. 얼마 전에는 시청에서 하는 컴퓨터 교실에도 석 달 다녔어요. 모르는 여자와 채팅도 해봤는데 그거 재밌던데요.”

컴맹이던 창기로서는 별천지를 경험했던 것이다. 그는 취미 추천에 대한 보답이라면서 동규에게 몇 개의 사이트를 알려주었다.

<14>

동규는 저녁 먹고 제 방에서 컴퓨터를 켰다. 창기가 알려준 사이트에 접속해 보니 젊은 여자들의 사진이 넘쳤다. 이성 교제를 원한다는 사연과 나이, 신체 사이즈까지 나와 있었다.

동규는 가까운 김해시 여성을 택했다. 나이는 38세, 임혜지. 함께 여행할 남성을 원한다고 했다. 동규는 내일 만나자는 쪽지를 남기면서 가슴이 더워졌다.

사진과 인적사항은 사실과 다를 수 있다. 그런 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순진하거나 초짜라는 증거다. 그런데 동규는 순진한 초짜라서 그걸 다 믿으려고 달려든다.

다음날, 동규는 상태 만난다면서 집을 나섰다. 이제는 거짓말도 태연하게 한다. 미리 준비만 하면 별것 아니라 생각했지만,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약속 장소에서 만난 혜지는 탁구공처럼 통통 튀는 여자였다.

“옵빠야, 머리칼 멋져요. 근데 염색은 하지 마세요. 은발이 좋아요, 옵빠야!”

코맹맹이 소리가 어색하지 않고 행동거지가 귀엽다. 먹는 모습도 예쁘다. 혜지는 입이 계속 바쁘다. 말이 무척 많고 군것질도 많이 한다.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인다.

“옵빠야, 이 족발 참 맛있어요. 옵빠야도 얼른 드세요. 안 그러면 제가 다 먹어치워요. 그리고요, 다음엔 돈가스 먹고, 그다음엔 아귀찜 사주세요.”

키도 자그마하고 약간 마른 몸인데 얼마나 먹는지 모르겠다. 또 두 번째는 친구도 데리고 나왔다.

“얘, 미라야. 우리 옵빠야 참 좋지? 나이는 좀 많아도 마음이 넓어서 짱이야. 꼭 우리 외삼촌 같아. 정이 많아 맛있는 것도 엄청 사주거든. 그리고 말이야, 다음에 너도 남자 만날 때 날 데려가. 우린 영원한 우정을 맹세했잖아, 그치?”

혜지는 떠들며 먹고 친구는 끄덕이며 먹는다. 그녀들이 갈비와 냉면까지 게걸스레 먹는 동안에 동규는 두 여자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저희끼리 잔을 쨍쨍 부딪치면서 술도 잘 마신다. 동규가 두 잔 마실 동안 이 여자 둘이서 세 병째를 땄다.

그뿐만 아니라 혜지는 거짓말도 많이 한다. 처음엔 독신녀라고 하더니 다음에는 남편이 외국 출장을 떠났단다. 동규가 타는 심정으로 모텔에 가자니까, 아이가 학원 마치고 올 시간이라 집에 들어가야 한단다. 아이가 없어서 입양하고 싶다는 말을 처음에 했는데 말이다. 혜지의 입에 걸리는 것은 먹는 것과 숨소리 빼고 모두 거짓말 같다.

혜지의 반복되는 거짓말에 질려버린 동규는 골똘히 생각을 모았다.

‘나를 안 만나는 날에는 다른 남자 만나서 얻어먹고 거짓말이나 늘어놓겠지.’

상태 말처럼 이런 여자가 꽃뱀일지도 모른다. 실컷 사 먹여놓고 결정적인 순간에 깡패 같은 놈에게 당할지 누가 아는가? 이상한 사진 찍혀서 목돈 요구하는 협박이라도 받으면 어쩌나? 애정도 없고 신뢰감도 없으니 피곤할 뿐이다. 김해와 밀양을 오가며 다섯 번이나 만났지만 손도 한 번 못 잡고 끝내버렸다. 동규는 안 되는 것은 억지스럽게 하지 않는 사람이다.


동규는 파김치처럼 피곤했다. 명애에게 자주 거짓말하는 것도 스트레스가 되고, 혜지의 거짓말을 계속 듣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집에서 짜증 부리는 횟수가 많아지니까 명애가 걱정했다.

“여보, 그렇게 짜증 부리면 몸 상해요. 내가 넘어지면 업고 달려갈 사람은 그래도 당신뿐인데 같이 아프면 안 돼요.”

“걱정하지 마. 아직은 괜찮으니까.”

동규는 그렇게 말을 했지만 작년과는 몸이 확실히 다르다고 느꼈다.

“여보, 그러지 말고 한 이틀 여행이나 다녀오세요. 마침 병규가 집에 있으니까 괜찮아요.”

“여행은 무슨…….”

“아뇨, 그냥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오세요. 여비 좀 드릴 테니.”

명애는 요즘 남편의 늘어진 어깨가 안쓰러웠고, 동규 역시 너무 답답해서 하루쯤 집을 떠나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이튿날 아침에는 명애가 동규의 구두를 말끔하게 닦아 놓고 옷도 챙겨주었다.

“당신은 이 자주색 남방이 잘 어울려요.”

명애는 감색 체크점퍼와 손수건까지 챙겨주면서 봉투도 하나 주었다.

“이거 뭐요?”

“여행비 50만 원……. 그것만 다 쓰고 오세요.”

“카드 쓰면 되지 뭘 돈까지…….”

“카드는 브레이크 고장 나면 많이 쓰니까 안 돼요. 그 돈만 쓰고 오세요.”

사실 명애는 카드 명세서에 나타날 모텔, 식당, 찻집 따위의 여행 흔적을 나중에라도 알게 되는 게 싫었던 것이다. 아니, 남편이 그런 부담을 느낄지도 몰라서 그랬다.

<15>

동규는 자동차에 기름을 가득 채우는 동안 내비게이션에 불국사를 찍었다. 운전하면서 트로트 메들리를 틀고 크게 따라 불렀다. 동규는 음치라서 좀체 노래를 안 부르지만 혼자 운전할 때는 조금씩 따라 부른다. 특히 졸음이 올 때는 바락바락 고함지르며 핏대를 올린다. 여행은 자유롭게 해야 좋은데, 그중에서도 혼자 멋대로 노래 부르는 자유가 으뜸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이틀이지만 혼자 돌아다니는 게 정말 좋다. 볼일 보러 가는 길이 아니므로 서두를 이유도 없다. 차를 천천히 몰며 낯선 풍경을 살피는 여유, 그 여유를 즐기기 위해서는 지방도로가 고속도로보다 좋다.

경주에서 여기저기 구경을 했다. 짝을 지어 다니는 연인들의 행복한 표정이 부럽기도 했으나 잠깐이었다. 빨리 가자거나 천천히 가자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자체가 자유의 침범이라서 거추장스러울 것이다. 걷는 길과 속도까지 죄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다는 것은 중요한 자유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해거름 때 포항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먹고 잘 곳을 찾기 위해 바닷가로 차를 몰았다. 헤드라이트를 켤 때쯤 바닷가의 자그마한 레스토랑을 찾았다. 하얀색의 차분하고 예쁜 건물 벽에는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네온 간판이 보였다. 동규는 ‘비 오는 날에는 영업을 안 하나?’ 하고 생각하며 쿡쿡 웃었다.

마침 5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역시 바다를 보고 있는 3층짜리 모텔이 있었다. ‘됐어. 저녁은 여기서 먹고 잠은 저기서 자면 되겠네.’

동규는 자기 생각에 만족하면서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비수기에다 평일이라 그런지 한 테이블에만 젊은 연인이 있었다. ‘all for the love of a girl’이 잔잔히 흐르고 조명도 부드럽다. 동규는 갑자기 장현희가 생각났다. 학교 때 갈래머리 장현희는 저 노래를 무척 좋아했었다. 아니, 친구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잘 불렀다. 박인희의 노래도 잘 부르던 현희는 조용한 여고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끄러운 술꾼이 되었으니, 세월 참!


원목 테이블과 잘 어울리는 카키색 의자는 크고 푹신했다.

주문한 비프커틀릿을 가져온 주인 여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동규도 어딘가 낯이 익다 싶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닮은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동규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저쪽에서 힐끔거리던 여자가 그릇 치우러 와서 말을 걸었다. 누구든지 제집에서는 용감한 법이니까.

“저… 손님, 혹시… 민…….”

“맞아요. 내 성이 민가요.”

“맞죠? 민동규 선생님? 저 모르시겠어요?”

주인 여자는 눈이 왕사탕처럼 커졌다.

“가만있자, 누구시더라……. 낯이 많이 익었….”

“네, 선생님. 저 은미예요. 허은미요.”

“아, 맞아! 허은미. 그래, 이게 얼마만이야?”

허은미는 동규가 젊은 시절에 잠깐 교편 생활할 때의 여고생이었다.

“어머, 선생님. 여전히 멋지세요. 중후한 장년의 여유가 확 풍겨요.”

그랬다. 남녀공학이던 학교에서 총각 선생 민동규는 인기가 꽤 좋았다. 허은미도 민동규 선생을 좋아했던 단발머리 중의 하나였다.

“그래. 이 레스토랑 운영하고 있어?”

“네,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근사하네. 은미에게 잘 어울려. 좋은 위치에 좋은 레스토랑에 좋은 주인에, 아주 환상적인 어울림이야. 하하하.”

동규는 옛 제자를 만나서 모처럼 기분이 밝아졌다. 오늘은 시간도 많고 자리도 조용하고 편하니까 마음이 느긋해졌다.

마침 다른 젊은 손님이 들어왔기에 은미가 주문을 받으러 갔다. 은미의 육감적인 걸음걸이를 본 동규는 필우의 말이 생각났다.

-형님, 나는요. 오는 년 가슴과 가는 년 엉덩이만 보여요.―

동규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은미가 디저트 커피를 가지고 와서 말했다.

“선생님, 커피 드시고 밖으로 나가요.”

“밖에? 여기가 편하고 좋은데?”

“그래도 여긴 제 일터라서 싫어요.”

“이제 저녁 시간이라 손님도 많이 올 텐데.”

“평일에는 조용해서 주방 삼촌에게 좀 맡기면 돼요. 30년 만에 선생님 만났는데 지금 장사가 문제예요?”

“에이, 그래도……. 일부터 하고 나중에 얘기하지. 나 오늘 시간 많으니까.”

<16>

그러나 은미는 주섬주섬 챙기더니 동규를 밀어냈다. 은미는 레스토랑과 모텔의 사이에 있는 횟집으로 동규를 안내했다. 두 사람은 생선회와 술을 나누면서 옛날이야기에 푹 빠졌다. 숙제를 안 해서 혼났던 이야기, 선생님을 놀렸던 이야기, 은미는 친구들과 선생님들로부터 ‘허! 은미’처럼 불렸다는 이야기, 어떤 친구는 어디에 살고, 누구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밤 10시가 되었다.

“선생님, 오늘은 옆에 있는 모텔에서 주무세요. 제가 자리 봐 드리죠.”

동규는 가슴이 철렁했다. 자리를 봐준다니, 그건 방에 함께 들어간다는 말이라 갑자기 낭패감이 느껴졌다. 제자와 모텔에 간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건 엄청난 탈선이라고 생각되어 낯이 화끈했다. 앞에 앉은 은미를 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선생님, 여기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얼른 가서 주방장 퇴근시키고 문 잠그고 올게요.”

은미는 동규의 대답도 듣지 않고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치르고 나갔다. 혼자 기다리는 동규는 자리가 불편하고 입장이 무척 난감했다. 모텔에서 옛 제자와 단둘이 밤을 보낸다는 게 영 어색했다. 아니, 어색한 정도가 아니라 죄책감이 강하게 엄습했다. 이건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순간 필우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형님, 눈 딱 감고 저질러버려요. 너무 참으면 몸 상해요.”

그 위에 상태의 성난 얼굴이 오버랩되더니 따끔한 경고가 귓전에 맴돌았다.

“당장 그만둬! 안 그러면 명애 씨에게 알리고 자네 애들에게도 말할 거야.”

아버지에게 실망하는 아이들의 싸늘한 눈빛도 떠올랐다. 동규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은미가 오기 전에 얼른 이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동규는 주차장으로 급히 나갔다. 펄떡거리는 가슴을 심호흡으로 진정시키며 차를 몰았다. 조금 가다가 갓길에 멈추어서 내비게이션을 눌렀다. 우, 리, 집! 손가락이 약간 떨렸다. 계속 심호흡을 해서 조금 진정시켰다. 그래, 집에 가자. 동규는 뒤에 추격자라도 오는 것처럼 급히 차를 몰았다.

하지만 1km도 못 가서 차를 멈추었다. 혹시 음주 단속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몸도 피곤하다. 취기가 졸음까지 몰고 오는 것 같다.

‘달그림자’라는 모텔에 들어갔다. 안내실 아줌마에게 방 열쇠를 받아서 208호실에 들어설 때 휴대폰이 울렸다. 은미였다.

“선생님, 어디예요?”

“으응, 나 그냥 나왔어. … 미안해.”

“선생님, 차암 비겁해요. 어떻게 도망치듯이 그렇게…….”

“은미야, 실은 …….”

“알았어요. 끊어요.”

동규는 잠시 멍하게 앉아 있다가 샤워를 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비겁한 도망질과 선량한 분별력 사이에서 혼란을 느꼈다. 마음이 복잡했다.

팬티만 걸치고 침대에 올라가서 TV를 켰다. 모 대학 교수가 여대생에게 성추행해서 파면까지 당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동규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저런 나쁜 놈, 죽일 놈, 어떻게 스승이 제자를…….”

선생이 제자를, 상관이 부하 여직원을 성적으로 범하는 것은 지위를 이용한 폭력이라는 생각에 공연히 화가 났다. 방금 겪었던 자신의 상황과 묘하게 맞물려서 뉴스를 계속 보기 어색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니 19금 외국영화의 격렬한 정사 장면이 나왔다. 동규는 갑자기 욕정이 일어났다. 잠도 달아나고 한참을 뒤척거렸다. 도저히 그냥은 못 잘 것 같다. 동규는 생각했다.

‘여자가 있으면 좋겠다. 은미에게 전화할까? 아니야, 그렇게 나왔는데 무슨 염치로? 그리고 제자에게 어떻게 그 짓을……. 말도 안 돼. 다른 여자는? 혜지는? 아무리 그렇지만 이 시간에 여기까지 길이 어디라고. 그리고 거짓말쟁이는 싫어.’

동규는 가슴이 답답했다. 인터폰으로 안내실의 아줌마를 찾았다. 여자 하나 불러줄 수 있느냐고 물으니 이 시간에는 할증 요금이라 30만 원이란다. 동규는 인터폰을 내리고 생각했다. 한 번의 섹스에 30만 원이라니 너무 비싸다. 아내에게 받은 여행비가 있어도 이건 아니다. 30만 원이 애들 이름인가?

영화는 장면과 여배우가 바뀌었지만 역시 섹스를 하고 있다. 남이 하는 섹스는 더 환상적으로 보인다고 느꼈다. 동규는 방의 불을 모두 끄고 TV 화면도 좀 어둡게 조절했다. 그리고 자위를 시작했다.

동규는 은미의 붉은 입술과 풍만한 가슴과 부드러운 허리를 상상했다. 하지만 잠시 후에는 상상 속의 파트너를 혜지로 바꾸었다. 아무래도 제자와의 정사는, 비록 상상이라도 죄책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17>

아침에 눈을 뜨니 9시 50분, 근래에 보기 드문 늦잠이다. 얼른 씻고 근처의 식당에서 동태탕으로 식사를 했다.

동규는 내비게이션에 포항 죽도시장을 찍고 차를 몰았다. 국도변의 은행나무는 벌써 노란 옷을 입었고. 코스모스는 무더기로 춤판을 벌이고 있었다.

시장에서 동규는 미역, 김, 톳, 멸치, 우럭, 옥돔, 문어 따위를 잔뜩 샀다. 그리고 국화빵 2천 원어치 사니까 돈이 바닥났다. 이제 집으로 향해서 출발이다.

“어, 왜 벌써 왔어요?”

명애는 놀란 듯 반가운 듯 모호한 눈빛이었다.

“응, 그냥 일찍 왔어.”

“그래, 어디서 잤어요?”

“경주 근처 모텔에서.”

“누구랑 잤어요?”

“혼자 잤지. ……혼자 갔으니까.”

동규는 당당하게 대답하면서 혼자 잔 것을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근데, 이 상자들은 뭐예요?”

“건어물이랑 생선 좀 샀어. 죽도시장에서…….”

두 개의 종이 상자를 열어본 명애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세상에! 뭘 이렇게나 많이 샀어요?”

“돈 다 쓰고 오랬잖아? 그래서 물 쓰듯이 썼지, 뭐.”

동규는 그렇게 쓴 돈이 아깝지 않았다. 아내가 돈까지 줬지만, 바람을 피우지는 않고 바람 쐬고만 왔으니 내심 뿌듯했다.

동규는 단골 이발관에 갔다. 이발 끝나고 머리 말리고 있을 때 문자 신호음이 울렸다.

<동규 씨. 시간 좀 내줘. 마지막이야. 순지>

동규는 로션을 바르면서 생각했다. 마지막이라니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외국 이민이라도 가나? 아니면 뉴스에 가끔 나오는 황혼 자살이라도?

동규는 이발관에서 나오며 순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동규.”

“오호! 드디어 낚았네. 전화 고마워.”

“고맙긴… 근데 마지막이란 건 무슨 뜻이야?”

“아, 그거? 전화로 말하긴 좀…….”

“그래, 어디서 볼까?”

“음… 표충사에 청산장이라고 알지? 오후 6시에 거기서 봐.”

“알았어. 나중에 봐.”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동규는 표충사 쪽으로 차를 몰았다. 시골길이라도 요즘은 포장이 잘 되어있고 깨끗하다. 언덕에 보이는 감나무와 옻나무의 잎들이 가장 붉고 아름답다. 그저께 내린 가을비로 계곡에는 물이 불어있었다.

청산장은 오래된 한식당인데 2층에 레스토랑이 있어서 전통과 현대적 감각이 잘 어우러진 집이다. 1층 한식당에는 단체 손님들이 많아 2층으로 바로 올라갔다. 창 쪽 의자에 앉아 순지에게 문자를 보냈다.

<2층 레스토랑으로 바로 오면 돼.>

<알았어. 나도 30분 일찍 도착할 거야.>

동규는 최근 통화와 메시지 정보에서 순지의 이름을 모두 지웠다. 두 번 실수하면 바보라고 생각하며 삭제하고 확인까지 했다. 카운터에서 빌린 신문을 읽으니 졸음이 몰려왔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포근하여 깜빡 졸았다.

<18>

5시 35분. 순지가 들어왔다. 환갑의 여자답지 않은 옷차림이다. 무릎 쪽이 낡은 청바지, 헐렁한 자주색 스웨터, 빨간 운동화,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스카프, 그리고 노란색의 홀쭉한 배낭. 머리에는 챙이 제법 넓은 모자를 썼는데 머리칼은 안 보이고 얼굴만 보였다. 젊은 아가씨 같은 차림새가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다. 저 여잔 누가 뭐라 하거나 말거나 제멋대로라고 생각하며 픽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멀리서 볼 때만 발랄했다.

“오랜만이야, 동규 씨.”

순지가 악수를 청했다. 부드러운 손이지만 약간 차갑다. 가까이서 보니까 낯빛도 어둡다. 며칠 몸살이라도 심하게 앓은 사람 같다.

“어디 아파?”

“…….”

“늘 용감하던 사람이 왜 그렇게 힘이 없어?”

“힘 이야긴 좀 있다 하고… 뭐 좀 마실까?”

순지는 동규에게 묻지도 않고 키위 주스 두 잔을 시켰다. 옛날 스타일 그대로다.

“나… 있지……. 오래 못 살아.”

“뭐, 뭐라고? 왜?”

“응, 좀 아프거든. ……아니, 사실은… 많이 아파.”

“왜,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백혈병이래. 그것도 말기야. 참 재수도 없지.”

순지는 꼭 남의 일처럼 덤덤하게 말했지만 동규는 많이 놀랐다. 동규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순지의 얼굴만 살폈다. 톰 존스의 green green glass of home이 어색한 침묵을 메우고 있었다. 아까부터 올드 팝이 계속 나와서 좋다.

“그래서… 10년 만에 보자고 했구나. 진작 만나줄 걸 내가 너무 뺐구먼.”

동규는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바꿀 요량으로 농담조로 말했다.

“흥, 그래도 네 번 만에 만나주니 감지덕지네. 열 번쯤 찍어야 할 나무라고 각오했는데 말이야.”

순지도 분위기를 생각해서인지 가볍게 받았고 약간의 싱거운 농담이 오갔다.

주스를 한 모금 마신 순지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동규 씨, 나 지금 내 인생을 정리하는 중이야.”

“…….”

“젊었을 때는 주식과 부동산 사업으로 돈방석에 앉았지. 그러나 남편이 친구의 보증을 서서 거의 다 날렸어. 도박과 술에 빠졌던 남편은 젊은 여자와 살림도 차렸지. 그렇게 애먹이던 남편이 폐암에 걸려 돌아왔지만 1년 만에 죽었어.”

“아이고, 그랬나? 힘들었겠네.”

동규는 침울한 눈빛으로 순지를 바라보았다.

“난 미국에서 사업하는 아들에게 아파트까지 팔아 보냈지.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딸에겐 17평짜리 서민 아파트 전세금만 남기고 다 보냈어. 그런데 지금은 남편도 자식도 곁에 없어. ……잘 나갈 땐 돈방석이었는데, ……지금은 땅이 꺼진 거 같아.”

“애들은 자주 안 와?”

“걔들은 엄마에게 뜯어갈 돈이 없으니 안 오네. 나도 안 기다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1주일 후에 요양병원에 들어가기로 했어. 아파트 전세금 빼서…….”

순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창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마음 단단히 먹어. 약한 생각하지 말고. 천하의 배순지가 잘 이겨낼 거야.”

“동규 씨. 옛날얘기 하나 해줄게. 평생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옛날 우리 사귈 때, 벌써 40년이 흘렀네. 그때 내가 꿈을 하나 꾸었거든. 돌아가신 동규 씨 어머니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어. ‘아가, 내가 니 몸에서 손자를 보고 싶어.’라고 말이야. 웃기지? 우리 인연이……. 그런데 그건… 안개 같은 꿈이었어.”

“옛날 일인데 그냥 묻어두지 뭐 하러 꺼내?”

“…….”

순지가 대답 거리를 못 찾고 있을 때 레스토랑 총각이 와서 1층 단체 손님들이 다 나갔다고 했다. 아까 총각에게 부탁해 두었으니까 알려주는 것이다.

<19>

동규는 순지와 1층으로 옮겨 한정식을 시켰다. 순지는 젓가락으로 밥을 두 번 떼어서 동규의 밥그릇에 얹어주었다. 한 번 주면 정 없다는 말도 옛날처럼 덧붙였다.

“동규 씨. 많이 먹어. 우리 함께 식사하는 게 10년 만인가?”

“응, 그렇게 됐네. 진주에서 먹고는 처음이니, 세월 참…….”

“근데 10년 만의 식사도… 이제 끝이구나. 정말…… 최후의 만찬이네.”

동규는 순지의 눈이 조금 젖은 것을 보았다. 동규가 먼 쪽에 있는 고추김치를 집으니까 순지는 그 접시를 동규 쪽으로 옮겨주었다. 동규가 콩잎 장아찌를 떼기 어려워하자 순지가 젓가락으로 잡아주었다. 순지는 지금 동규의 식사를 돕고 있다. 동규는 생각했다. ‘맞아, 순지는 옛날에도 이랬어. 밥상에서는 착한 독재자였지.’

순지가 고등어 살점을 떼어서 동규의 숟가락에 얹어주며 말했다. 꼭 누나 같다.

“동규 씨 와이프는 조신하고 착하다던데…….”

“누가 그래?”

“내가 이래도 고성능 안테나거든. ……부인에게 잘해줘.”

“그만해. 남친의 마누라 이야기하면 매너 빵점이라더라.”

두 사람은 가벼운 잡담을 나누며 식사를 마치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산골의 가을밤이라 계단이 썰렁했지만 레스토랑에 들어서니 따뜻했다. 벽난로에서 타는 장작 냄새가 정겨웠다. 순지가 또 일방적으로 커피를 주문하더니 말했다.

“동규 씨, 나 부탁이 있어.”

“부탁? 뭔데?”

“우리 집에 나처럼 아프고 늙은 개가 한 마리 있거든. 근데 이름 하나는 참 좋아. 락희! 즐거울 락, 기쁠 희. 또 영어 럭키의 콩글리쉬야.”

순지는 창백한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에다 Lucky라고 천천히 썼다.

“락희, 럭키, 다 좋네. 근데 부탁은 뭐야?”

“내가 요양원에 들어가고 나면 동규 씨가 좀 어떻게 해줘.”

“어떻게? 난 개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동규는 순지가 개를 대신 키워달라는 것으로 생각해서 좀 난처했다.

“유기견 보호 센터에 갖다 주든지, 아니면 동물병원에서 안락사를…….”

“…….”

“부탁해. 내 손으로는 도저히…….”

순지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알았어. 내가 해줄게. 걱정하지 마.”

동규는 순지를 진정시키고 총각을 불러 커피 리필을 부탁했다. 순지와 더 오래 있고 싶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식사, 마지막 커피, 마지막 부탁…….

“동규 씨, 예전에 이런 말 했지? 첫물에는 아낀다고 안 먹었고, 한물에는 임자 아니라서 못 먹었다고 했잖아? 그리고 끝물에는 맛이 없어서…….”

“그만해, 그런 소리……. 뜻 없이 했던 말을 심각하게 기억해?”

“아니, 아니야. 나도 웃자고 하는 말인데 그걸 죽자고 막아?”

두 사람은 마주 보고 피식 웃었다.

“근데 동규 씬 왜 나를 그렇게 싫어했어?”

“싫어하지 않았어. 다만 우린 생각이 약간씩 틀렸고, 내가 순지 씨에게 휘둘리기 싫었던 게야.”

훗날 생각해 보니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순지는 부잣집 딸로서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편이었고, 동규는 순종형 여자를 원했다.

“그래, 요즘도 돼지갈비 먹으면서 뼈다귀 줄 세워?”

“…….”

“동규 씨는 그랬잖아? 밥상에 갈비 뼈다귀도 헝클어지면 안 되잖아? 매사에 정확하고 반듯하고……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해?”

“당연히 피곤하지. 그런데 줄이 헝클어지면…… 더 많이 피곤해.”

“아이고, 이제라도 좀 쉽게 살아. 앞뒤좌우 너무 견주지 말고, 적당히 차선위반도 하고 말이야. 사실 굽은 길에선 차선 물고 돌아야 쉽잖아.”

“참고하지. 근데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10년 전의 번호가 아닌데…….”

“그거야 쉽지. 동규 씨 동창회 총무가 내 사촌이거든. 대꽁은 당사자에게만 묻지만, 나는 다른 사람도 잘 활용해.”

“아하, 역시 고성능 안테나야!”

두 사람은 심각한 이야기를 애써 피했다. 순지는 동규의 아내가 심하게 아프다는 것도 사촌에게 듣기야 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동규는 주차장에서 순지의 차 문을 열어주었다. 10년 전에는 BMW였는데 지금은 자그마한 모닝이다. 아픈 순지, 작은 차, 홀쪽한 배낭, 죽은 남편, 멀리 있는 아이들, 헤어져야만 하는 락희까지……. 아픈 가을이다. 처연한 밤이다.

동규는 순지에게 말했다.

“요양병원에 들어갈 때는 내가 함께 갈게.”

“그래줄…래?…… 고마워.”

“고맙긴……. 그리고 락희는…… 내 작업실 옆에서 키워볼게.”

순간, 달빛 받은 순지의 눈이 젖어들더니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동규는 자주 면회 가겠다는 말은 그냥 가슴에 남겨두고 두 손만 잡아줬다.

순지를 먼저 출발시킨 후, 동규는 14년째 몰고 다니는 무쏘에 올랐다. 그리고 천천히 뒤따르면서 생각했다.

‘내가 가끔 순지 병원에 간다면 아내는 뭐라 할까? …… 그냥 몰래 다닐까?’

―끝― 원고지 197매


월, 목 연재
이전 11화단편-—첨성대를 훔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