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융통성을 잃어버린 사회에 내 한 몸을 헌신한 느낌인데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한 기분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 것을 잃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인정하는 범위가 아니면 마녀사냥하듯
한 사람을 완전히 구석으로 몰고 가는 것도 참 미친 짓이다.
모두들 가슴속에 가지고 있는 불만과 불평을 그 한 사람에게 꽂아놓고
마구 화살을 쏘아대는 것이다.
기회는 이때다 싶은 사람들처럼.
그럼에도 다들 자신이 다 옳다고만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다르다가 없다.
옳다 그르다만 있어서 참 답답한 노릇이다.
다른 이의 생각을 존중할 줄 모른다.
듣고 싶지 않아 한다.
자신의 이야기만 할 줄 알고
자신의 생각 외에는 다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 생각 이외의 생각을 듣게 되면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비판을 받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져
여러 가지 생각들을 우리가 함께 가져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다.
기분만 상하고 다르다는 것을
좀처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예민하거나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은 아니다.
먹는 음식도 입는 옷도 신는 신발도
사람을 만날 때도
대부분의 것을 다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참지 못하는 것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때,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할 때
굉장한 답답함을 느낀다.
자신만의 굴레에 빠져
"이것 아니면 안 돼!"를 외치거나
꼿꼿하게 "나는 조금도 양보하지 못해."
라는 것을 참지 못한다.
자신이 조금도 배려하지 못하고
양보하지 못하면
결국은 타인이 피해를 보는데도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주장한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다.
너무나 그렇다고 당연히 믿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나조차
그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없어지게 되어
꼿꼿했던 그 사람이 피해를 (?) 입게 된다.
그 사람을 위해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맞을까?
싶다가도 '입장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꼿꼿함을
다시 한번 겪게 되면
그 사람을 피해 다니게 될 뿐이다.
같은 나라 같은 문화권에 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생각인 것은 아니다.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알 수 없지 않은가.
결국 모두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사소한 것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고립되는 길을 걷게 될 뿐이다.
40이 훌쩍 넘어서 내가 가장 무서운 것이 있다면
자꾸만 생겨나게 되는 고집이랄까.
나도 모르게 굳어지게 되는 편견이 무섭다.
흔히 말하는 '꼰대'처럼
고고하게 나만 잘났어.
내 생각이 다 옳아.라는 식의
생각을 가지게 될까 봐 무섭다.
나이가 들면서 내게 맞는 방식과
루틴이 자리 잡게 되는데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좋을 거라 생각하고
은근히 유도하고 설득하려 하는
내 모습에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더 많이 배우되 더 많이 열어두어야 한다.
더 많은 책을 읽고
한 가지 방식이 아닌
다양한 방식의 정보망을 열어두고
한 부류의 사람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도 모르게 굳어지는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최근에 핫한 이슈였던
손흥민과 이강인의 이야기를 보면서
사실 이강인이 잘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많은 국민들이 이강인을 질타하고
부정적인 댓글을 단 것을 보았다.
언론도 그런 패턴을 유도하였다.
한 사람을 코너 구석으로 몰아가
패대기치는 모습을 보니
썩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들은 국대지만 관계 맺기는
그들의 영역이다.
이강인과 손흥민의 싸움으로 인해
패스도 다 말아 먹고
요르단전을 패배했지만
그것도 하나의 중요한 경험이었고
그들이 가져야 할 몫이었다.
우리는 그저 쓰리고 안타까움 혹은
마음속으로 조그마한 짜증쯤 가지면 끝인 것이다.
이선균도 최진실도 서이초 교사도
그리고 우리 사회에 큰 문제인
20~30대 젊은 층의 높은 자살률도
참 안타깝다.
그들의 몫이 아닌
다른 이유로 질타를 받았다.
부정적인 편견으로 인해
슬픈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여러 번 겪어 보았음에도
또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제는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나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