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는 서울, 경기 같은 추운 지역보다
늦은 김장을 하고
감과 고구마가 늦게 익는다.
11월 초순이 되니
단감은 다 따고
까치가 먹을 것만 남았다.
고구마는 굳은 땅 안쪽으로
굵직하게 자랐지만
미처 캘 여력이 없는 시골이다.
적극적인 자세로
캐는 것을 돕겠다는 딸아이의 선언(?)으로
올해 고구마 수확을 시작하게 되었다.
거제 시가 앞 감나무
아파트 촌과 많이 떨어진 시가.
시골은 시골인가 보다.
곳곳에 감나무 밤나무가
내 것인지 네 것인지 모르는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
수확이 끝났는지
비교적 아래쪽에 달린 감들은
다 따서 나무가 비어져 있었고
손이 잘 닿지 않는 높은 곳에는
까치밥이 하나, 둘 대롱대롱 달려있다.
수확이 다 되어
몇 알 남아 있지 않은
빈털터리 감나무이지만
까치밥이 하나둘씩 달린 모습은
동전이 가들 들어찬 호주머니처럼
넉넉하고 무거워 보인다.
밭일 의자 착용 중
집 앞에 바로 있는 텃밭에는
상추도 있고 부추도 있고 배추도 있지만
딸아이가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고구마이다.
찐 고구마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할아버지가 직접 장작불에 구워주신
군 고구마는 좋아하는 아이이다.
목수용 장갑을 끼고 호일을 살살 벗겨서 먹는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서
입술을 갖다대기도 두려운 노오란 색의 고구마를
앞니로 조금씩 물어 먹으며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사실 딸은 고구마를 먹는 것보다는
다른 의미로 고구마를 사랑한다.
작은 손에 잘 잡히지 않을
두툼한 것을 캐어내는 기쁨에 고구마를 사랑한다.
매년 시부모님이
고구마를 한편에 심으시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구마를 캐는 요령은 간단하다.
커다란 포크같이 생긴
'도라지창' 끝을 땅에 박고
발로 여러 번 더 깊이 푹! 푹! 꽂아대면
도라지창의 쇠 부분이 땅에 깊이 박힌다.
도라지창의 손잡이를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밑으로 힘주어 내리면
땅에 박힌 고구마와
흙이 함께 솟구쳐 올라오는 원리이다.
흙과 고구마 줄기,
그리고 고구마가 뒤섞여
땅 위로 올라오면
딸아이의 호미 쥔 손은 바빠진다.
고구마의 긴 뿌리는 손으로 간단히 뜯어내고
고구마만 골라 내 소쿠리에 담는다.
급한 마음에 호미질을 잘못하여
고구마가 중간에
절단(?) 당하는 일이 속출한다.
고구마 캐기의 사고를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잘린 고구마를 바라보며
9살 딸아이는
혼자 속상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11월에 늦은 가을에
땀이 주르륵 흐르도록
도라지창으로 열심히
땅속을 파헤쳐 주는 할아버지와
아이가 다칠까 봐
낫으로 연신 아이 옆의
고구마 줄기들을 잘라내주시는 할머니
그리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캐낸 고구마의 흙을 잘 털어내는 엄마
삼인의 합작품 덕분인지
두 박스 가량의 고구마 캐내기를 끝낸 딸은
마지막 한 문장의 말로
셋을 기막히게 만들 뿐이다.
"할미!! 할비!! 나 정말 재밌었어!!!
내년에 또 내가 고구마 다 캐는 거 도와주러 올게!!!"
캐다가 잘린 고구마
올해의 고구마 수확은 딸아이 덕분에 무사히 잘 마쳤다.
내년에도 그 내년에도 고구마 수확을 위해
거제를 방문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지만
몇 년이나 더 지속될지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감도 고구마도
트렁크 한가득 실어
2시간 거리의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운전하여 돌아오는 길,
백미러 속에 보이는
침 흘리며 꿀맛 같은 단잠을 자는 모습은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