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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지기 친구, 그리고 우리의 20대, 30대, 또

by Anna

알게 된 지 20년이 넘은 내 친구와 만났다.

20대를 함께했던 우리.

각자 스물아홉, 서른하나의 나이에 결혼하 아이 둘과 아이 셋을 낳았다.

젖 물리던 시절 즈음에는

간혹 연락해서 우리 집에서 1박 2일 동안 함께한 적도 종종 있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느꼈는지 낯선 사람의 얼굴이 눈에 박혔는지

밤새 울어대는 아가들 덕분에 어르고 달래느라 지쳐서 우리 둘 다 얼굴이 노래졌었다.

낮에는 걸음마 하는 걸음 뒤를 따라다니고

기어 다니는 머리통이 장난감 모서리로 향하지 않는지 보초를 서느라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는 힘들었었다.

너와 내가 참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기 띠에 아이를 안아 재우면서라도

한두 마디 농담이라도 하려하였다.

서 있는 채로 달콤한 케익을 입에 후딱 밀어 넣으며

육아를 하는 시기를 버티고자 애썼다.

자유롭고 즐거웠던 20대와 너무도 다른 30대여서

우리 둘 다 처음 겪어보는 일들을 잘 해내려고 온 힘을 다했다.

위로도, 힘을 주는 말 한마디도 나누지 못할 만큼 마음의 여유라고는 없었다.

우리 둘 다 위로가 필요했지만 서로 잘 이겨내라는 마음속의 응원만 할 뿐이었다.

내가 힘든 만큼 너도 힘들겠지. 내가 버티는 만큼 너도 최선을 다하고 있을 거야.

잘 이겨거라는 믿음만은 분명하게 있었다.

우리의 30대는 뭐랄까.

우리의 젊음과 청춘을 아이들에게 헌혈해 준 느낌이었다.

내 것을 준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어서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하고

얼마나 간절히 소망하였는지 모른다.

발끝에 남아있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헌혈을 마치자

우리는 세월을 맞아버렸고 아이들은 훌쩍 자라났다.

내가 나이가 든 딱 그만큼 아이들은 자라났다.

혼자서 학교를 걸어가고 숙제를 하고 핸드폰으로 문자로 할 말을 전한다.

이마만큼 키워내느라 무엇을 포기했는지

무엇을 희생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지경이다.

내 젊음을 다 전해준 것치고는 또 너무 행복하고 사랑스러웠다.

우리의 30대는 이제 끝이 났다.

젊음도 싱그러웠던 아름다움도 사라졌지만

육아의 최전선에서는 다소 멀어질 수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느끼는 순간

거울 속의 내모습이 또 나를 멈칫 하게 하지만..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얼굴을 보니

10년 전처럼 편하고 즐거웠다.

우리의 지난 얘기를 두서없이 하느라

머릿속은 온통 그 시절의 행복한 추억이

다시 소환되어 흥에 겨워 있었다.

친구의 목소리와 말투는 예전 그대로였다.

마흔 살이 넘어서 조금 체력이 떨어져 보이는 것 빼고는

예전 그대로의 발랄함이 물씬 느껴져서

20년 전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내가 알던 너는 싱그러웠던 20대 그 목소리인데

중학생이 되는 아이의 엄마이자

일터에서는 능력을 인정받는

중견 워킹맘이라니 매치가 안 되는 듯도 했다.

어색함 그 자체라고나 할까.

사회에서 만났다면 정신없는 우리의 말투가 아닌

점잖게 예의를 갖춘 말투를 쓰면서

어떤 사람일지 가늠해보며 첫 만남에

으레 저절로 튀어나오는 가식적인 배려를 선보였겠지.

그렇지만 우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마 20년만에 만난다해도 그 반가움 그 설렘 그대로일테지.

우리의 모습이 변했구나. 우리가 잊고 살았구나.

10년을 온통 우리가 아닌 우리의 아이들에게 쏟아붓느라

우리는 없었다는 것이 절절하게 실감이 났다.

가까이 살면서 자주 보았다면 아마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전보다 푸석해진 머리칼을 쓸어넘기면서 하는

너의 이야기가 얼마나 우리가 성숙해졌는지

무르익었는지 알게 해 주는 것 같았다.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많은 물을 어디로 보내야 할지 몰라

소나기처럼 물을 이리저리 튀게 하는 한여름 폭포 같은 20대를 우린 내내 함께했었다.

우린 사방팔방으로 튕기는 탱탱볼 같았다.

작은 사고나 실수에도 당황하지 않고 늘 당당했던 우리였다.

하고 싶은 것을 숨기지 않았고

사소한 일에도 깔깔깔 숨넘어가게 웃는 것이 일상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일랑 신경도 쓰지 않고

우리는 우리의 20대를 빈칸 하나 없이 꽉꽉 눌러 채웠더랬다.

학교를 다니고 수업을 들으면서도

강의를 마치고 오늘은 무엇을 할까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서로를 쳐다보며 계획을 짰더랬다.

붙어 다니면서 많은 사람도 만나고

과외 대신 학원에서 중학생 아이들을 가르치는 꿀같은 아르바이트도 함께 하고

입석 기차표를 사서 경주까지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학교 식당에서 1,200원짜리 값싼 밥을 사 먹고

전공 책을 베고 잔디밭을 뒹굴뒹굴하는 것도

꽤 낭만적인 일상이었다.

빽빽한 콩나물 같은 도서관에 가는 대신

시험 때마다 빈 강의실을 물색하여

우리만 쓰는 강의실처럼 시험공부도 했다.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하는 시험공부는 지겹지도 않았다.

우리를 시기 질투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함께 어울려 놀길 바라는 친구들도 있었다.

20대 초반 캠퍼스의 낭만은 그렇게 바람같이 빨리도 지나가버렸다.

20대 후반에는 우리는 다행 같은 지역에 살면서 여전한 환상의 케미를 자랑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만나도 또 이야기가 가득했고

하고 싶은 것들일 잔뜩인 일상이었다.

'그건 하기 싫어.' '거기는 가고 싶지 않아.'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듯하다.

친구가 추천하는 곳이 있으면 일단 출발하고 보는 식이었다.

내가 만나자고 하는 다른 친구가 있으면 일단 전화해서 불러내었다.

서로의 친구를 만남에 있어서도 불편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내 친구가 더 많아지고 있다는 즐거움만 있었다.

참 잘 맞는 단짝이었다.

누구를 만나도 어색함이 없었던 것,

처음 가보는 곳에 가도 주저함이 없었던 것,

서로의 장점에 대해서 시기 질투가 없었고

못난 점에 있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다른 어떤 친구가 나에게 이런 존재일까,

다른 어떤 이가 나와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평생에 한 명도 갖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누군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려 하고

또 누군가는 추천하는 장소, 먹거리를 자신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하기도 한다.

개인의 취향과 성향을 충분히 공감하는 바이지만

내 친구와 이렇듯 잘 지냈다니.

특히 시너지 효과로 더 광활한 곳을 '슈퍼 소닉'처럼

발 빠르게 누볐다는 것은 인정할 만했다.

30대의 싱크홀을 건너뛰어 40대에 다시 만난 우리 둘은

추억을 내내 이야기했다.

되새김질하고 또 되새김질하였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였으니까.

꼰대같이 과거에 발 묶여 있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과거의 우리가 없이는 지금의 우리도 없었을 것이다.

많은 추억, 함께했던 시간들, 함께 가보았던 곳,

그곳에서 있었던 즐거운 이야기들이 혼합되어 나를 서 있게 한다.

나를 단단히 붙잡아 버티게 해준다.

지금은 아름답던 20대도 아니지만

그때 우리는 아름다웠었기에 그 시절이 매우 향기로웠기에

40대인 지금도 여전히 향기로운 것 같은 착각에 산다.

그런 착각이 없다면 아마도 30대보다 더 텅 빈 것 같은 40대 일 것이다.

어떤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나이대에 맞는 경험과 시간이 평생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고.

알밤같이 달콤함과 영양이 가득 찬 우리의 20대.

알찬 기억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삶에 힘이 되고 웃음이 되는 기억과 추억들은 너무나 소중하다.

그것을 잊고 살면 '나'라는 사람이 완성이 다 되지 않은 것과 같다.

탱탱볼같이 이리저리 탱탱거리면서 살아왔던 것이

큰 힘이 되었고 내 삶의 교과서가 되었다.

실수는 줄었고 마음의 여유는 커졌다.

그리고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20년 지기 친구를 다시 만나면서

이제 두 번 다시 누릴 수 없는 젊음, 청춘의 음악이 내 가슴속에서 언제나 연주될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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