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문장 위에 당신을 썼다

by 서율빈

오래전에 쓴 문장을 다시 읽다가, 그 위에 남아 있던 어떤 시간을 떠올렸다.


책장을 펼치면 오래된 문장이 남아 있었다. 비어 있는 문장이, 이전과 다음 페이지 사이에서 얇게 흔들렸다. 그 문장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고, 나는
몇 번이고 적으려 했지만, 문장은 이미 누군가의 흔적을 지나고 있었다.


기억은 불완전한 문장처럼 남아 있다가, 사라진 후에야 또렷해졌다. 나는 적으려 했고, 당신은 지워버렸다. 흔적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그 자국을 바라보았다. 이미 엷어지고 있었다.


한때 당신의 손이 스쳤던 자리, 책 위에 남아 있던 체온이 잉크처럼 서서히 퍼져나갔다. 입술이 맴돌았다. 숨결이 문장의 결을 따라 흐렸다. 손끝이
지나간 자리마다 잉크가 흔들리고, 활자가 번지고, 눌린 곳마다 낮은 숨이 남아 있었다.


책장이 열리자 문장은 어긋났다. 당신의 문장이 내 피부를 적셨고, 나는 한 줄씩 읽었지만, 단어는 이미 흐릿해졌다.


밤이 깊어졌고, 낡은 검색창을 열었다. 익숙한 이름이 흘러가듯 떠올랐다. 입력한 문장은 페이지를 넘기듯 사라졌다. 책상 위엔 밑줄 없는 원고가 남아 있었고, 끝맺지 못한 문장들이 바람도 없이 넘겨지고 있었다.


기다린 적도, 배웅한 적도 없었지만, 나는 늘 당신을 떠나보냈다.


오래된 문장 위에 당신을 썼다.


책장을 덮었다. 페이지는 조용히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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