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
은퇴 후, 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글이 실린 날
은퇴 후의 시간은 생각보다 무례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있었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자꾸만 공허함 속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안 책장을 둘러보다 우연히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집 앞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책 속에 파묻혀 지내는 날들이 점점 많아졌다. 책 속 사람들과의 만남은 낯설면서도 신선했다. 언젠가부터 좋은 문장을 메모하게 되었고, 밑줄을 그을 수 없는 도서관 책 대신 소장하고 싶은 책은 중고서점에서 구입해 나만의 책장을 채워갔다. 자연스럽게 나의 기록도 쌓이기 시작했다.
나이 들어 글을 쓴다는 것
‘나이 들어 글을 쓴다는 게 과연 의미 있을까?’ 이 질문이 오랫동안 마음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다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다. 짧고 서툰 글이었지만 분명히 내 생각이 담긴 글이었다.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땐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고민했다. 그 과정 속에서 바깥세상과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다.
공원을 산책하며 보던 익숙한 길 위에서 꽃 한 송이, 간판 하나, 나무 그림자에 눈길이 갔다. 매일 스쳐 지나던 것들이 글감이 되었고, 조금씩 글쓰기가 재미있어졌다. 문장이 길어지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졌다.
블로그, 그리고 누군가의 공감
블로그에 첫 글을 올렸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누군가가 공감의 댓글을 남겨주었다. 그 짧은 반응 하나가 내게는 세상 무엇보다 큰 응원이 되었다. 그 후, 인천 중앙도서관 독서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2년 동안 두 권의 책을 공저로 출간하는 소중한 경험도 했다.
매달 셋째 주 화요일, 새벽 첫차를 타고 인천으로 향하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 글이 한 권의 책에 담긴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글로 표현된 나의 생각이 활자가 되어 세상에 나온 날, 그날은 분명히 내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글쓰기는 점점 습관이 되었다. 내 안의 이야기를 꺼내어 문장으로 정리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마음속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나도 아직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감정이 생겨났다.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 누군가의 마음에 울림을 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책 속에서 만난 한 줄의 문장 앞에 멈춰 서서, 그 문장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내 삶에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고민하며 글을 썼다. 가끔은 글을 쓰다 울컥해질 때도 있다. 감정이 쏟아지는 순간, 답답했던 마음이 글을 통해 정리되고 치유되는 기분을 느낀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계속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글쓰기를 시작하며 마음속에 품었던 작은 바람, ‘브런치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현실이 되던 날. 처음 작가 승인 메일을 받았을 때, 가슴이 벅차올랐다. 글을 쓰며 나를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였는지를 그 순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가족이 진심으로 칭찬해 주었고, 나 스스로에게도 조용히 ‘잘했어’라고 말을 건넸다.
그날은 분명히 내 인생에서 손꼽히는 자랑스러운 하루였다.
지금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꿈을 향해 걸어간다. 독서모임 친구들과 함께 작은 잡지를 만들기로 했다. 우리의 글을 엮어, 우리만의 책을 만들고자 한다. 서툴지만 진심이 담긴 글.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 그 모든 것이 한 권의 책 안에 담길 예정이다. 이제는 단순한 ‘독서가’가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 스토리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 그 고민으로 오늘도 하루를 시작한다. 제2의 인생은 ‘나를 표현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삶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