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예의 마을, 이사동

조용한 의례의 공간, 생각이 깊어지다

by 이월규

도심을 살짝 벗어나 외곽의 한적한 마을 끝자락에 이르렀을 때, 나는 고즈넉하게 자리한 한옥과 오래된 의례의 흔적과 마주했다.


소도시 여행이란 이렇게 조용한 공간 속에서 잊고 지낸 나 자신과 다시 마주하는 시간이 아닐까. 오늘 내가 향한 곳은 대전 동구 이사동, 최근 문을 연 대전별서 유교전통의례관이다.


익숙한 길을 벗어나 처음 가보는 낯선 도로로 들어서는 순간,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입구에 들어서자 큼지막한 세로 플래카드들이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일상의례, 일생의례 마당극 청사초롱’, ‘이사동 규방’, ‘이사동 꼬마선비 체험’, ‘일상의례 체험’ 등, 낯설지만 흥미로운 문구들이 이 공간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기에 더 궁금해지는 이름들,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따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안내소에 들어서니, 친절한 담당자께서 이곳의 유래와 운영 방식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다. 작년 12월에 개관해 벌써 7개월째 운영 중이며, 전통 한옥에서 숙박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잠시 상상해 보았다. 고요한 마루에 앉아 여름밤을 보내는 모습을.


이날 나는 초충도 그리기 체험에도 참여했다. 초충도란 풀과 벌레를 소재로 한 그림으로, 조선시대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화가였던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나는 두 점의 초충도를 완성했고, 섬세한 붓질과 채색을 따라가며 신사임당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보는 시간이었다. 신사임당이 자연을 바라보던 따뜻한 섬세한 시선이 내 손끝에서도 흐르고 있었다.


숙박 공간은 온돌방과 침대방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전통의 멋과 현대적인 편안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예약제로 운영된다는 점에서, 한옥에서 보내는 하룻밤은 숙박이라기보다는 시간을 머무르게 하는 특별한 경험이 될 것 같았다.


무더운 날씨 때문이었을까. 한옥의 처마 사이로 스쳐가는 바람 한 줄기에도 조선의 여름이 실려 오는 듯했다.

바람 소리와 함께 전해지는 옛 시간의 숨결을 느끼면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
남는 건 무엇일까.”


유교 전통은 떠난 이를 보내는 의례의 방식 속에서 남겨진 이들이 품어야 할 마음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고요한 가르침이 한옥 마을 안에서, 말없이 전해지고 있었다.




이사동은 대전에서 유일하게 조선시대 유교 장묘 문화가 온전히 남아 있는 마을이다. 무려 520여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은진 송 씨 가문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곳 산자락에는 1,070여 기의 봉분이 자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마음에 깊이 남았던 건, 이 마을이 형성된 배경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선조의 묘를 이곳에 모셨고, 그 묘를 돌보기 위해 후손들이 하나둘 이주해 오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한 마음이 곧 삶을 이어가게 했고, 그 마음이 모여 지금의 마을을 만든 것이다.

‘죽은 자를 기억하며,
산 자가 모여든 마을’

이보다 이사동을 잘 설명하는 문장이 또 있을까. 마을은 ‘상사한리’와 ‘하사한리’,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주랭이들’이라 불리는 터로 나뉘어 있다. 그중에서도 상사한리의 음지댐 부근에는 지금도 후손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다.


1499년, 상주와 홍주 목사를 지낸 송흥원 서상이 이곳에 처음 묻힌 이후, 그의 아들, 손자, 그리고 후손들의 묘역이 대를 이어 자리를 잡으며 지금의 장엄한 문중 묘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사동은 마을이 아닌 시간이 쌓여 만든 공동체, 그리고 기억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만든 ‘살아 있는 유산’이다. 이사동의 역사를 알고 나니 더 숙연해졌다.




빠르고 간편한 것에 익숙해진 시대, 우리는 어느새 누군가를 기억하고 함께 예를 갖춘다는 마음을 잊고 살아온 건 아닐까. 이사동에서의 시간은 그 잊고 지냈던 ‘예’의 의미를 조용히 되새기게 했다. 말없이 전해지는 공간의 힘, 시간을 품은 마을의 숨결이 느껴졌다.


‘별서’란, 조선의 선비들이 본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은 작은 거처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 잠시 숨을 고르던 공간이라고 한다. 그 뜻을 알고 나니, 이곳이 왜 ‘대전별서’라 불리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신식 호텔의 편안함도 좋지만, 고즈넉한 한옥에서 전통과 함께 머무는 하룻밤은 조용한 위로가 되어 마음 깊은 곳에 남을 것 같았다. 처마 끝으로 내리는 강렬한 햇빛과 나지막한 담장 사이로 지나는 바람, 그리고 이 마을이 오래도록 품어온 시간의 무게. 그 모든 것이 오늘 내게 가장 큰 선물이 되었다.




소도시 여행의 매력은 번화한 풍경보다 조용히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쉼표 같은 공간’ 이었다. 이사동처럼, 우리가 잊고 있던 전통과 묵묵히 이어지는 삶이 숨 쉬는 공간은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같은 지역 안에서도, 조금만 방향을 달리해 걸어보면 생각보다 쉽게 이런 고요하고 깊은 장소를 만날 수 있다.


알고 보니 내가 걸은 길은 여행지가 아니라, 내 삶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그 여름, 몰아쓴 일기와 곤충 채집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