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4
웅성웅성웅성웅성.
댓글 창은 숨 쉬는 생물처럼 들끓고 있었다. 누군가는 처음부터 느낌이 싸했다고 썼고, 누군가는 관상은 과학이라고 단정했다.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듯, 싫어하는 데도 이유는 필요 없었다. 이유는 늘 사후에 발명되었다.
'신승아.' 요즘 인터넷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이었다.
"학폭 피해자가 있다더라". "스태프들한테 갑질이 장난 아니라더라". "싹수가 없대."
문장 끝에는 언제나 ‘카더라’가 붙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꼬리를 굳이 읽지 않았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건이 벌어졌다’는 그 상황, 그리고 물어뜯을 대상이 생겼다는 흥분감이었다.
“이 정도는 약과지.”
누군가가 그렇게 쓰자, 기다렸다는 듯 욕설이 쏟아졌다. 평소 여신이라 부르며 숭배하던 입들이 순식간에 방향을 틀었다. '창녀, ' '걸레, ' '인간 말종'. 손가락 끝에서 튀어나온 단어들은 화면 위에서 서로를 밀치며 더 자극적인 자리를 차지했다. 사람들은 그 과정을 보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 직접 때리지 않아도 되는 폭력, 흔적이 남지 않는 배설.
웅성웅성웅성웅성.
기사는 매시간 갱신되었다. ‘의혹’, ‘논란’, ‘파문’. 제목은 늘 단정했지만 내용은 비어 있었다. 사실 확인 중이라는 문장만이 복사되어 떠돌았다. 그러나 공백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공백은 상상으로 채워졌고, 상상은 곧 확신이 되었다.
한 번 부정적인 이미지가 씌워지자, 그녀는 무엇이든 퍼부어도 되는 대상이 되었다. 어제까지 숭배의 대상이었던 얼굴은 오늘 조리 돌림의 중심에 놓였다. 사람들은 서로의 분노를 인용하며 자기 행동을 정당화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잖아.’ 집단 속에서 윤리는 얇아졌고, 책임은 증발했다.
신승아는 그날도 혼자 앉아 휴대전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면을 넘길수록 자신이 아닌 어떤 괴물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설명할수록 더 의심스러워질 뿐이라는 걸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침묵해도 죄. 말해도 죄.
그날 밤, 사람들은 또 다른 사건의 조짐을 맡고 있었다. 웅성거림의 속도가 조금 느려졌을 뿐, 허기는 여전했다. 대중은 반성하지 않았다. 다만 잠시 쉬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먹잇감이 나타나기를, 다시 한번 함께 짖어대기를.
웅성웅성웅성웅성.
판단 불가지점. 진실과 거짓이 구분되지 않는 그 지점에서, 굶주린 사냥개들은 조용히 침을 흘리고 있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컴퓨터 화면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신승아’는 더 이상 그녀 자신이 아니었다.
편집되고, 확대되고, 잘려 나가며 만들어진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얼굴을 향해 쏟아지는 욕과 혐오, 저주.
처음에는 화면 너머의 허상에게 던져지는 말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들은 분명히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분노와 증오는 밖에서 시작되었고,
서서히 그녀 안으로 스며들었다.
“다… 내 탓이야.”
혼잣말은 점점 확신이 되었다.
“나만 사라지면 되는 거야.
그러면 더 이상 날 욕하지 않아도 되잖아.”
고통을 끝내고 싶었다.
사는 일은 더 이상 즐겁지 않았고,
견뎌야 할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쓸모없다는 감각과
살 가치가 없다는 결론뿐이었다.
신승아는 그렇게 떠났다.
부고 기사가 올라오자
사람들은 뒤늦게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언론을 탓했고,
자극적인 기사와 댓글 문화를 탓했으며,
누가 그녀를 죽음으로 몰았는지를 따졌다.
그러나 그 질문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신승아의 이름은 한동안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남긴 마지막 흔적을 되짚느라 바빴다.
캡처된 영상, 잘린 문장, 맥락 없는 표정들.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여전히 조각난 상태로 소비되었다.
부고 기사 아래에는 애도의 말이 쏟아졌다.
“너무 안타깝다.”
“이 사회가 또 한 사람을 죽였다.”
“악플러들은 반성해야 한다.”
누군가는 언론을 탓했고,
누군가는 유튜버를 탓했고,
누군가는 ‘요즘 세상’을 탓했다.
그러나 그 수많은 문장들 속에서
자신이 썼던 말 하나를 떠올리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저 분위기에 섞여 던졌던 한마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 사실처럼 옮겼던 순간,
‘느낌이 안 좋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단정했던 기억은
모두들 너무 사소한 것으로 취급했다.
신승아는 끝내 해명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해명할 자리를 얻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떠난 뒤에야
“사실은 잘 몰랐다”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그 말은 놀랍도록 쉽게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며칠 후,
새로운 이름이 검색어에 올랐다.
사람들의 분노와 정의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또 다른 얼굴을 향해 이동했다.
신승아의 이야기는
그렇게 조용히 과거형이 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묻지 않았다.
왜 우리는 늘 누군가가 사라진 뒤에야
누가 가해자였는지를 따지기 시작하는지,
왜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그토록 잔인하게 확신에 차 있는지.
그날도 인터넷은 정상적으로 작동했고,
댓글은 끊임없이 갱신되었으며,
사람들은 여전히 믿고 있었다.
자신은 아니라고.
절대, 자신은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