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3
화순 능주로 가는 길에는 오래된 백일홍 가로수가 길게 이어져 있다.
광주에서 화순으로 밥을 먹으러 가는 날이면, 엄마는 차창 밖을 바라보다가 어김없이 말을 꺼내신다.
“우리 어머니가 그러셨지. 백일홍이 피었다 졌다, 피었다 졌다를 세 번 보면 나락을 먹는다고.
지금은 쌀 품종이 달라서 그때만큼 꼭 맞진 않겠지만….”
그럴 때면 나는 꽃잎이 붉게 흩날리는 도로 위에서, 엄마를 거쳐 할머니에게 닿는 오래된 계절의 리듬을 느낀다.
엄마는 가끔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다.
젊은 시절 만주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세월을 견디신 뒤,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돌아오실 때 가져온
단돈 오십 원으로 지금의 화순 능주 외가를 사셨다는 것이다.
“그때는 오십 원이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지.
할아버지의 땀과 고생이 없었다면 우리 집이 여기 있을 수 없었어.”
엄마의 목소리에는 자랑과 감사가 함께 배어 있었다.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늘 학처럼 고고했다.
하얀 백발에 구릿빛 피부, 명절이면 하얀 도포 같은 한복을 입으신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에 반해 나를 무척 아껴주셨던 할머니는 언제나 막걸리에 살짝 취해 계셨다.
음식을 장만하느라 분주한 와중에도 한 손에는 막걸리 주전자가 들려 있었고,
때때로 할머니의 곰방대는 우리 손주들의 장난감이 되었다.
고쟁이 바지 위에 한복 치마를 대충 묶어 입은 할머니가
마당 토방에 걸터앉아 뻐끔뻐끔 곰방대를 피우실 때,
나는 쫄래쫄래 옆에 앉아 재잘대곤 했다.
“왜 집에서 돼지를 키워?”
“할머니는 개가 왜 그렇게 예뻐?”
“저 창고에는 뭐가 있어?”
심지어 “할머니, 할머니는 내 할머니야, 개 할머니야?”라고 묻기도 했다고 한다. 내 딴에는 할머니가 개를 너무 예뻐하시는게 질투나서 그런 모양이다
그때 내 나이는 겨우 네 살이었다. 할머니는 그런 질문을 한 나를 너무 귀여워해주셨고 그 이야기는 두고두고 이모와삼촌들 사이에서 회자 됐다.
할머니는 언제나 인자한 미소로 내 모든 질문을 다 받아주셨다.
세대를 건너 흘러온 이야기는 이렇게 엄마의 입을 통해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백일홍이 피고 지는 길 위에서, 만주에서 돌아와 집을 일군 할아버지,
막걸리 향을 풍기며 곰방대를 피우시던 할머니, 그리고 그 모든 기억을 들려주는 엄마.
계절이 바뀌어도 그들의 숨결은 내 안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 숨결이 오늘의 나를, 그리고 우리의 시간을 지탱해 준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할머니는 나에게 한없이 인자했지만, 원래는 그리 다정다감한 성품은 아니셨던 것 같다. 투박하고 거칠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내 질문에는 언제나 귀 기울여주셨던 것 같다. 마지막에는 치매로 돌아가셔서 그렇게도 이뻐했던 날 기억하지 못하시고 날 앞에 두고도 "지윤이"에 대해 말씀하시던 기억에 그 앞에서 엉엉 울어버렸던 나를 부모님이 집에 가자고 데리고 나왔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숫자와 이치에 밝아 집안의 대소사를 다 도맡으셨다고 한다. 팔 남매를 낳으시면서도 늘 바쁘셨고, 한 번은 큰 외숙이 군대에서 휴가 나오던 날, 막둥이 삼촌을 임신하고 계셨는데 그게 너무 부끄러워 혼자 아이를 떼려고 하늘 수박 뿌리를 달인 물을 마시고 마당의 뒤엄자리에서 엄청 토하셨다고 한다.
후일담으로 보면, 그 용감한 시도가 무색하게도 아이는 무사히 태어났고, 그 사건은 가족들 사이에서 지금도 가끔씩 의도 없이 막내 삼촌을 놀리는 용도로 언급되곤 한다.
누나들에게 너무 들어서 이미 면역이 되었는지 막내 삼촌은 몸이 조금만 아파도 장난스럽게 내게 말하곤 한다.
“너희 할머니가 나 임신했을 때 하늘 수박 뿌리 달인 물을 마셔서 그런지, 내 몸이 이 모양이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웃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그런 농담을 하는 막내 삼촌은, 사실 외할아버지를 쏙 빼닮은 멋쟁이다.
환갑이 넘은 지금도 늘씬한 키에 잘생긴 얼굴, 어디서나 눈에 띄는 미남이다. 그런 막내삼촌은 지금은 모임이면 누나들을 놀려먹는 데 제일 일등공신이다.
가족들이 다 모여서 식사 후에 고스톱을 치는 걸 좋아하시는데 막내삼촌이 얼마나 누나들을 놀리면서 치는지 옆에서 지켜봐도 분할 정도다.남동생이 누나들 놀려먹는게 아무래도 외삼촌을 닮은 듯하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마다하지 않고 매번 고스톱에 응해서 돈을 잃는 건 우리 엄마다 아무리 놀림 당해도 삼촌들과 쳐야 제일 재미있으시다는 거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이제 세상에 안 계시지만, 두 분을 닮아 성품 고운 팔 남매는 여전히 우애 깊게 지내고 있다. 서로를 끔찍할 정도로 아끼며, 늘 곁에서 힘이 되어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