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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마지막 시험이라 생각하며 준비했던 임용고시

Chapter Ⅲ 

   2017년 2월부터 나는 집 근처 동사무소에서 최저시급을 받으며 행정보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반일제로 하루에 4시간만 하는 일이라서 시간적인 여유는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다발성경화증 주사 치료제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이었는데도 주사약의 부작용은 여전히 심했다. 주사를 맞은 그다음 날에는 머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고 온몸에 근육통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당시 29살이었던 나는 뭐라도 안 할 수는 없어서 하루 4시간짜리 동사무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지만, 주사 맞은 다음날은 동사무소 아르바이트도 힘에 부치는 날이 많았다.

 

   동사무소에서 행정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4명이 있었다. 다른 행정보조들은 맡은 일을 다 하고 민원인들도 오지 않을 때면 옆 사람이랑 이야기를 하거나, 휴대폰을 만지거나, 업무용 컴퓨터로 옷 등을 보곤 했는데, 나는 그 시간에 차라리 책을 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사무소 일하다가 짬시간이 생기면 지난 1년 동안 아파서 하지 못했던 임용고시 공부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동사무소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일을 한지 두 달쯤 지나면서부터 나는 조금씩 이 일에 실망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바라본 동사무소의 내부는 바다 같았다. 수평선은 참 평온한데, 수심 안을 보면 제각각의 모습을 취하는 것처럼 진주 같은 사람도 있고, 조개 같은 사람도 있고, 바위에 붙은 미역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중 내 업무 담당 공무원은 약육강식의 전형적인 사람처럼 느껴졌다. 본인보다 조금이라도 위라 생각되는 사람한테는 슬슬 기는 모습을 보였던 반면에 , 본인보다 어떤 의미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조금이라도 낮게 보이는 사람한테는 기분 나쁜 말들을 주저 없이 했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쁘다고 말하면 그때서야 농담이었다며, 기분 나빠하는 사람을 꽁한 사람인마냥 귀인 시켜버리곤 했다.

 

   담당 공무원을 겪으면서 나는 '강자에게도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을 말할 수 있고, 약자에게는 더 낮은 자세로 그들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이 먹었다고 다 되는 성인이 아닌, 진정한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동사무소에서 짬시간에 조금씩 임용고시 공부를 하다가 본격적으로 임용고시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4월이었다. 그래서 4월부터는 내가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시간인 오후 2시부터 6시까지를 제외하고는, 주사 부작용 때문에 아파도 진통제를 복용하고 임용고시 공부를 매일 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공부의 루틴이 조금씩 잡혀가는 시점인 4월 말쯤에는 동사무소 일을 그만두고 임용고시 공부에만 전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동사무소 일은 11개월짜리 반일제  계약직이었고, 시간이 갈수록 부당하게 느껴지는 대우와 무시당하는 것들이 은근히 점점 심해졌다. 그래서 하루빨리 이 일을 과감히 그만두고, 임용고시 공부에 전념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임용고시 공부를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하면서 해의 임용고시 공부가 내 인생 마지막 임용고시 공부라는 느낌도 강하게 들었다. 그만큼 당시까지도 건강이 많이 좋지 않았고, 마음도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5월 초 나는 동사무소에 이번 달까지만 하고 일을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리고 나의 주변 정리를 하나씩 하기 시작했다. 5월에도 동사무소 일 하는 시간을 제외한 오전과 밤 시간에는 공부를 했기에 공부만 전념해서 하게 되는 6월부터는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신경 쓰이는 것들을 차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카카오톡 어플을 휴대폰에서 삭제했다. 그리고 임용고시를 치르게 되는 12월 초까지 얼만큼의 시간이 있는지 계산했고, 그 시간 동안 교육학 8과목과 전공 6과목을 어떻게 공부할지 계획을 세워서 공부를 해 나갔다.

 

   동사무소에서 2월부터 5월까지 네 달 동안 당시 최저임금으로 하루에 4시간씩 일 한 급여는 한 달에 60만 원 정도였다. 나는 그동안 생활하면서 최소한으로 돈을 쓴다 해도 한 달에 이삼십만 원은 썼기에, 네 달 동안 일해서 남은 돈은 130만 원 정도였다. 5월에 임용고시 공부 계획을 세우면서 12월 임용고시를 보기 전까지 인터넷 강의 비용과 독서실 비용 등 돈 나갈 것을 계산해 보니 아무리 최소한으로 잡아도 당시 내가 가지고 있는 130만 원으로는 무리였다.

 

    보통 임용고시생들은 서울 노량진에서 준비를 많이 한다. 노량진에서 공부를 하게 되면 강의와 책 비용과 더불어 매달 월세, 식비, 교통비도 더 지출되는 상황인데 나는 노량진에 월세와 식비 등을 쓰기 싫었다. 그래서 집과 독서실을 오가며 공부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고, 5월 마지막주에 부모님께 현금 100만 원만 주실 수 있냐며 부탁을 드리게 되었다.


   부모님께서는 100만 원으로 임용고시 볼 때까지 가능하겠냐며 물으셨고, 나는 가능하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그다음 날 현금 100만 원이 담긴 봉투를 부모님께 받았다. 봉투를 받는 순간 올해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공부해 보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6월 첫날, 나는 미용실에 가서 긴 머리를 남자컷으로 깎았다. 이미 그해로부터 1년 전  2016년 3월, 다발성경화증을 확진받은 지 두 달쯤  지나서 머리카락을 35센티 잘라 <한국 백혈병 소아암 협회>에 기부했다. 그 결과 나는 짧은 단발의 머리로 한동한 살아갔었다.


   그런데 작년의 짧은 단발머리도 1년여의 시간이 지나다 보니 어깨를 넘어버리는 긴 머리가 되어 버렸다. 나는 이왕 공부하려고 굳게 마음먹은 이상  

매일 머리 감고 말리는 시간도 공부할  낭비될 같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머리카락이 길면 공부하다가 나도 모르게 미모에 신경 쓰게 될까 봐 그런 여지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싶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남자컷처럼 아주 짧게 머리카락을 잘랐다.


   머리카락을 아주 짧게 자른 그날 집에서 나의  머리를 본 남동생과 아빠 그리고 엄마는 경악을 금치 못 했지만, 나는 그런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았다.


   5월까지는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 인터넷 강의만 봤지만, 일을 그만두고 6월부터는 강의를 보면서 나만의 서브노트를 만들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손글씨 쓰는 게 어릴 때부터 많이 불편했지만, 서브노트만큼은 손글씨로 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불편함에 이어 다발성경화증 주사 치료제를 맞은 다음날에는 약의 부작용으로 두통과 근육통 심하면 오한까지 오면서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주사 부작용이 있는 날이면 도저히 앉아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나는 독서실로 가지 못하고, 내 방 침대에 누워서 공부했다. 누워서 공부하는 것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나는 교육학 8과목과 전공 6과목을 정리한 걸 내 목소리로 읽어서 휴대폰으로 녹음하기 시작했다. 녹음을 다 하기까지는 1달 가까이 걸렸고, 하루에 짧으면 4시간씩 길면 6시간씩 거의 매일 녹음했다. 나는 이렇게 녹음한 파일을 내가 밥 먹을 때마다, 씻을 때마다, 아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있을 때마다 휴대폰 스피커 볼륨을 크게 틀어서 들었다.

 

   그리고 12월 초, 대망의 임용고시 날이 다가왔다. 그 해에도 대구에는 내 과목 티오가 많이 없어서 나는 다른 도시로 시험을 보러 갔다. 시험 보는 곳은 대구에서 많이 먼 수도권이었지만, 이때는 나 혼자 시험 전날 미리 시험장 근처 숙소에 도착해서 하룻밤 자고 시험을 쳤다.

 

   1차 필기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대구로 내려와서 나는 바로 2차 시험을 준비했다. 임용고시 1차 시험 결과는 보통 한 달 뒤에 나오는데, 2차 시험은 1차 시험 결과 발표 후 약 열흘쯤 뒤에 보기 때문에 1차 시험 결과 발표 후부터 2차 시험을 준비하게 되면 이미 늦어버린다. 그래서 보통은 임용고시 1차 시험을 본 후 1차 시험의 합격 여부를 알지 못해도 2차 시험 준비를 대부분 다 한다.


   2018년 1월 초,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컴퓨터를 켜고 수험번호를 입력해서 임용고시 1차 결과를 조회했다. 한참을 눈감고 있다가 눈을 떠서 모니터를 보니, "합격"이었다. 1차 결과 발표 전까지는 합격하게 되면 엄청 기뻐 날뛸 줄 알았는데, 막상 합격 결과를 확인하니 생각보다는 무덤덤했다. 내 교과 특성상 2차 시험은 실기시험, 면접시험, 수업실연시험 이렇게 총 3개의 시험을 봐야 되었고, 실기시험도 청음, 피아노 치면서 노래 부르는 거, 장구 치면서 민요 부르는 거 이렇게 3개를 봐야 되었다.

 

   실기시험 중 청음은 들리는 음악을 바로 악보로 옮기는 건데, 이건 내가 절대음감이라서 고등학생 때 대학교 입시 레슨을 받을 때부터 자신 있던 거였다. 피아노 치면서 노래 부르는 시험은 1차 필기시험을 준비하면서부터 거의 1년 동안 꾸준히 연습해 왔던 터라 큰 부담이 없었다. 그런데, 장구 치면서 민요 부르는 것은 여름에 인터넷 강의로만 잠깐 배웠고, 집에서 혼자 장구 치며 민요를 불렀기에 피드백을 받을 수 없어서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1차 시험이 끝난 후부터 민요 개인레슨을 받았고, 1차 시험 결과 발표 후 2차 시험을 보러 가기 전까지는 일주일에 세 번씩 민요 개인 레슨을 받았다. 5월에 부모님께 받은 100만 원은 1차 시험 원서 접수비까지 내고 나니 다 쓰게 되어서 민요 레슨을 받을 때는 다시 부모님께 50만 원을 더 받아서 레슨비를 냈다.


   1월 중순, 나는 실기시험과 면접시험 그리고 수업실연시험을 보러 다시 수도권으로 올라갔고, 이 시험은 하루씩 총 3일을 봐야 되어서 3박 4일 동안 시험장 근처 숙소에 머물렀다. 그런데, 하필이면 2차 시험을 보기 일주일 전부터 나는 감기에 심하게 걸려서 목소리를 내는 게 매우 힘들 만큼 목이 아팠다. 아무리 병원에 가고 약을 먹어도 감기는 쉽게 낫지 않았다. 그래서 피아노 치면서 노래 부르고, 장구 치면서 민요 부를 때 나는 정말 최악의 목 상태로 시험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많이 아쉬웠지만, 시험은 운이라 생각하고 내가 감기에 걸린 상태에서 시험을 치르게 된 것 또한 나의 운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2차 시험의 마지막 날, 면접시험을 보게 되었다. 1차 시험을 치른 후부터 나와 같은 도시로 시험을 쳤던 사람들끼리 면접 스터디를 했다. 나와 스터디원들은 우리가 시험 쳤던 도시의 최근 몇 년간 출제되었던 면접시험 문제를 살펴본 결과 면접시험 문제는 총 3문제가 나왔고, 그중 한 문제 이상은 시책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시책을 중점으로 스터디해 보자고 결론지었다. 시책은 각 시 교육청의 그 해 주요 업무 계획 ex. 사교육비 경감을 위한 학교 방과 후 수업 지원 등... 이런 사업들을 나열한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 면접스터디를 할 때마다 시책을 열심히 외우고, 그 시책을 바탕으로 어떤 면접 문제가 나올지 예상하면서 면접시험을 준비했다. 그런데, 면접 당일 나온 문제는 우리가 여태까지 외우고 준비했던 시책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이 도시에서는 절대 이런 문제는 나오지 않을 거다’라며 생각했던 문제가 나오게 되었다.


   면접시험 당일 문제를 받아 봤을 때 나는 정말 난감했다. 나와 같은 도시에서 면접을 본 다른 사람들에게도 후일담을 들어보니 시책만 달달 외우면서 준비했는데 시책은 하나도 나오지 않아서 난감했다는 반응이었다. 면접 문제는 총 3문제로 즉답형 1문제와 구상형 2문제였다. 즉답형은 면접관님들 앞에 앉았을 때 문제를 볼 수 있고 문제를 보자마자 바로 답변을 해야 되는 것이다. 구상형은 면접장에 들어서기 전 미리 문제를 볼 수 있는데 한 문제당 답변을 구상할 수 있는 시간은 1분이다. 이때 난감했던 문제는 즉답형으로써 <내가 담임교사가 되었을 때 우리 학급의 급훈은 무엇으로 하겠는가? 이 급훈을 교육적으로 학생들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이런 내용의 문제였다.


   즉답형 문제였기에 구상할 시간 없이 문제를 보고 난 즉시 답변을 해야 됐다. 그때 나는 문제 지문에서 "급훈"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생각나는 단어는 ‘감사’였다. 그래서 나는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다.


  나: 제가 담임교사가 되어서 급훈을 정하게 된다면, “항상 감사하자”로 정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감사함을 많이들 잊고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담임 맡고 있는 반의 학생이 저에게 찾아와 “선생님 저는 감사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도대체 뭐가 감사한지도 모르겠는데 왜 급훈을 감사하자라고 하신 거예요?”라고 질문한다면, 저는 그 학생에게 “네가 볼 수 있는 것도 감사한 거고, 걸을 수 있는 것도 감사한 거고, 밥 먹을 때 치아로 씹어 먹을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이 말을 하던 중 나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겪어왔던 과정이 생각나면서 갑자기 내 눈에 눈물이 맺혔고, 목이 메었다.


   목이 메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면접장에서 면접관이신 장학사님 또는 교장 교감선생님이실 것 같은 다섯 분이 앞에 계시는 가운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내 앞에 면접 시간을 카운트 다운하는 전자시계를 보면서, ‘저 시간 안에 세 문제에 대한 대답을 다 해야 되는데... 시간은 1초 또 1초 계속 흘러가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멈추지 않는 거야... 제발 눈물 좀 그만 나와라’라며 아무리 내 마음속으로 소리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면접장에서 소리 못 내고 고개 숙여서 눈물만 뚝뚝 흘리며 혼자 발버둥 치던 찰나, 면접장에 면접관님들과 같이 계셨던 면접시험 감독관 선생님이 나한테 오셨다. 그리고 휴지를 주시면서 내 어깨를 두드리며 “괜찮아, 잘하고 있어, 괜찮아.”라고 말해 주셨다. 그 선생님의 위로로 인해 나는 잠시 뒤 받은 휴지로 눈물을 닦으면서 면접 3문제를 제한 시간 안에 답변하고 나왔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물이 나오면서 추스르는데만 시간이 1분 이상 소요되어 제한 시간 안에 면접 문제에 대한 답변을 완벽하게 하지 못한 것 같다는 아쉬움이 너무도 컸다. 면접시험을 본 후 나는 숙소로 돌아가 면접장에서 울었던 것을 후회하며 한 시간 넘게 소리 내서 엉엉 울었다. 면접장에서 눈물이 나온 것이 너무 아쉽고, 목감기 걸린 목소리로 실기시험을 친 것도 너무 아쉬워서 그날은 저녁도 먹지 않고 울기만 했다.


   다음날, 3박 4일의 2차 시험 일정을 끝내고 나는 기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갔다. 기차 안에서 지난날 면접시험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미 시험은 다 쳤고, 다시 칠 수도 없어. 만약에 이번 2차 시험에서 떨어진다 해도 어쩔 수 없어. 그래도 이렇게 아픈 몸으로 시험 준비 열심히 했어. 후회 없어. 괜찮아. 혹시 결과가 안 좋더라도 실망하지 말자. 그리고 다른 길을 찾아보는 거야. 정말 미련 없이 열심히 했으니까 괜찮아.’


   숨 가쁘게 달려온 2017년과 2018년의 1월이었다. 그리고 임용고시 최종 결과 발표 날인 2018년 2월 초의 어느 날, 그날의 발표 시간인 오전 10시가 되었다. 이번 시험이 나의 마지막 임용고시 시험이라 생각하며 지난 1년 동안 준비 해 왔기에, 2차 시험에서의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너무 자책하지 말자며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면서 2차 시험 결과를 확인했다. 결과는 "최종 합격"이었다. 그리고 내가 염려했던 면접시험의 시험 점수는 생각보다 높게 나와서 놀랐다. 최종 합격을 처음 확인 하는 그 순간 눈물이 날 거라 예상했는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얼떨떨해서 모니터를 몇 번이고 다시 보고 또 봤다. 몇 번을 봐도 합격이었고, 이내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엄마한테 전화했다. 부모님께는 일부러 임용고시 최종 결과 발표 일을 말씀드리지 않아서 내가 전화를 하기 전까지 부모님은 그날이 발표 일인지 모르셨다.


 나: 엄마, 나 임용고시 최종 합격했어.

 엄마: 정말? 너무너무 축하해. 진영아 너무 고생 많았어. 엄마 너무너무 좋다. 아빠도 엄청 좋아하실 거야. 오늘 발표 난 거야?

 나: 응

 엄마: 근데 왜 오늘 아침까지 아무 말도 안 했어?

 나: 혹시 떨어졌을까 봐. 떨어졌는데 엄마아빠가 결과 계속 기다릴까 봐 일부러 말 안 했어.

 엄마: 정말 고생 많았다 우리 딸. 엄마 너무 행복하고 기쁘고 고맙다.


   엄마와의 통화를 끝마치고 나는 한동안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었다. 내 마음속이 미칠 것 같이 요동쳤고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들끓어 올랐다. 어린 시절부터 어제까지의 내 삶이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뭉클하고 한편으로는 허한 느낌도 들었다. 그러다 피아노 뚜껑을 열어서 피아노를 치며 나의 허한 마음을 달랬다. 그때 내 마음을 다 녹여내어서 친 곡은 <Amazing grace>였다.


   2월은 원래 시간이 빨리 간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2018년의 2월은 나에게 굉장히 바쁘고 정신없어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는 그런 달이었다. 2월 초에 임용고시 최종 합격을 확인한 후, 그다음 주에 내가 시험 친 도시에 가서 숙소를 잡아 놓고, 일주일 동안 신규 교사 연수를 받았다. 그리고 연수 마지막 날인 금요일 오후 4시쯤에 3월부터 근무하게 될 학교가 발표되었다. 학교가 어디로 발표되느냐에 따라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그때부터 자취방을 구해야 됐는데, 하필이면 그다음 주 월요일부터가 설 연휴였다.

 

   연수를 끝마치고 나는 금요일 저녁에 대구로 내려가서 부모님께 학교를 알려드리자, 아빠는 그다음 날인 토요일에 내가 발령받은 학교 근처 주소의 부동산을 검색해서 부동산에 연락하셨다. 그리고 설날 차례를 지낸 후 부모님과 나 이렇게 3명은 아빠가 토요일에 미리 연락해 놓으셨던 나의 학교 근처 부동산으로 갔다. 5시간 동안 운전하시는 아빠가 피곤하실까 봐 좀 죄송했지만, 한편으로 나는 설레기도 했다.


   부동산에 도착해서 부모님과 같이 사장님이 보여주시는 방을 두 군데 정도 봤다. 사장님은 이미 지금 2월 중순이라 대부분의 괜찮은 방은 많이 나갔고, 깔끔한 방이 하나 있긴 한데 신축이라서 좀 비싸다고 하셨다. 아빠는 그 방도 보여 달라 하셨고, 같이 가서 보니 엄마 아빠 나 이렇게 3명 다 신축 방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아빠는 나한테 신축 방이 마음에 드냐고 물으셨고, 나는 당연히 마음에 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신축 방을 계약하러 부동산으로 다시 갔다. 나는 그날 생에 처음으로 월세 계약서를 쓰게 되었다. 그리고 아빠는 보증금 500만 원을 부동산 사장님께 그 자리에서 현금으로 드렸다. 나는 그 순간 아빠가 이렇게 다 준비를 해 오셨다는 것에 놀랍고 너무 감사했다.


   방을 계약하고 엄마는 내가 자취방에서 당장 덮을 이불을 사야 된다며 그 동네에 있는 이불 가게로 아빠랑 나를 이끄셨다. 이불을 사고 우리 가족은 인근 대형마트로 가서 내가 쓸 살림살이를 샀고, 또 가구점에 가서는 내 옷을 수납할 가구도 샀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어 우리 가족은 저녁을 간단히 먹고 그날 계약한 내 자취방으로 다시 가서 배달 온 가구를 들였다.

 

   엄마는 아빠가 장시간 운전으로 피곤하실 것 같아서 내 자취방에서 자고 그다음 날 아침에 대구로 내려가자 했지만, 아빠는 아침에 가면 차가 많이 막힌다며 배달 온 가구를 정리하고는 바로 대구로 내려가는 운전대를 잡으셨다. 그렇게 내가 살 곳과 살림살이를 다 마련해 주시고 내려갈 때도 장시간 운전하시는 부모님을 차 뒷좌석에서 나는 아무 말 없이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그런 시간이었다.


   설 연휴가 끝나자마자 나는 앞으로 근무하게 될 도시로 다시 올라갔다. 그리고 3월부터 근무하게 될 중학교에도 찾아가서 인사드렸다. 굉장히 떨리는 마음으로 교무실 문을 열고 신규교사라며 인사드렸던 때가 아직도 눈에 선하게 기억이 나곤 한다.


   그리고 시교육청으로 가서는 신규교사 임명장을 무대 위에 올라가 받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참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의 신규교사 고군분투기는 이어서 Chapter Ⅳ부터 소개된다.

커뮝 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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