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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 2016. 03. 07. 월.

Chapter Ⅲ

   2015년 12월은 참 견디기 힘들 때였다. 돌이켜 생각해서 지금 다시 그때의 일이 나에게 닥쳐온다 하면 2015년만큼 하지 못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던 시간 속에서 나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은 채로 많은 것을 해 나갔다.


    2015년은 임용고시 공부를 처음 시작하면서 교생실습을 하고, 졸업논문을 쓰고, 갑자기 한쪽 눈이 안 보이게 됐고, 보이는 다른 한쪽눈만을 의지하며 다른 도시로 임용고시를 보러 갔고, 졸업논문 심사 발표를 했고, 논문 심사 이후 졸업을 위한 절차들을 하나씩 밟아갔고, 입원했던 병원에 가서 스테로이드 약 소론도정을 받아 오면서 다발성경화증이 아니길 바라며 다발성경화증이라는 병에 대해서 계속 찾아봤던 그런 해였다. 그야말로 정신없는 한 해였다. 그리고 6년 전 내가 맹목적으로 순수하게 좋아했던 사람이 생각났다.


   그 사람은 당시 본인이 나보다 9살이나 많다며 나한테 너 또래의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내 마음을 거절했었다. 그랬던 나의 첫사랑을 6년이 지나서 내가 한쪽 눈이 안 보이게 되었 어느 날, 막연히 다시 꼭 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 사람의 연락처를 찾고 싶었다.


   2015년과 그로부터 6년 전은 굉장히 많은 차이점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스마트폰의 유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2010년 이전에는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이었고 그때 나는 폴더폰을 썼다. 그때 나보다 9살 많은 사람을 아무런 조건 없이 맹목적으로 무작정 좋아했고, 좋아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그때 나는 처음 알게 되었다. 또한 카카오톡이 없었으니 오로지 전화 문자로만 연락을 이어갔다. 문자를 보내면 상대방의 확인 여부를 내가 알 수 없었으니 오로지 상대방의 연락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 사람에게 문자 한 통 보내면 나는 온갖 생각에 사로잡혔다. '읽었을까? 아직 안 읽었을까? 읽었으면 왜 답장이 안 오는 걸까? 안 읽었다면 지금 많이 바쁜 건가?'이런 등등의 생각에 사로잡히다가 손빨래를 하러 갈 때도 항상 휴대폰을 들고 갔다. 문자 알림 소리가 들리면 그 즉시 빨래를 멈추고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그 사람의 답장이 아니라서 아쉬워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참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했던 사람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그 사람도 서로가 바빠서 그랬을까, 연락이 드물어지다가 스마트폰이 보급화되던 시절 나는 휴대폰 번호를 변경하게 됐다. 그러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첫사랑이었는데, 내가 제일 힘들고 아플 때 그 사람이 다시 생각났고,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다시 보고 싶다는 갈급함이 내 마음을 에워쌌다.


   그런데, 당시 나는 그 사람의 연락처를 몰랐기에 어떻게 하면 나 스스로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번득 네이트온이 떠올랐다. 네이트온은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 싸이월드와 연동되어서 사용하던 메신저였는데, 당시 SK텔레콤 이용자가 네이트온에 휴대폰 번호를 등록하면 네이트온 메신저로 문자 100개까지 공짜로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웬만한 SK텔레콤 이용자들은 거의 대부분 네이트온에 휴대폰 번호를 등록했을 것이다.


   나의 첫사랑도, 나도 그 당시 SK텔레콤을 이용하고 있어서 내가 네이트온으로 그 사람에게 문자를 보낸 것이 기억났다. 당장 나는 컴퓨터를 켜서 네이트온을 검색하고 다운로드하여서 실행했는데, 문제는 거의 몇 년 만에 로그인을 하는 거라 아이디 비밀번호가 기억이 안 났다. 아이디 비밀번호 찾기를 통해 겨우겨우 로그인을 한 후 네이트온 친구 목록을 보니 그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메일 주소와 휴대폰 번호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간절하게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게 이런 건가 잠시 기쁨에 젖어있었다. 그때는 아직 다발성경화증 확진을 받기 전이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다발성경화증이라는 굴레에서 잠시 벗어난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의 휴대폰 번호를 내 휴대폰에 저장하고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확인하니,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그 사람 사진이 뜨는 걸 확인하고는 당장이라도 전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나이를 생각해 보니 나보다 9살이 많기 때문에 어느덧 삼십 대 후반이 되어서 어쩌면 결혼을 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바로 전화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 생각 들어 네이트온에 나오는 메일 주소로 메일을 써서 보냈다.


   메일을 보내고 수신확인을 하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수신확인란에 확인 안 된 채로 나와있어서 카카오톡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카카오톡 메시지를 썼고, 카카오톡 숫자 1이 없어지기만을 바라고 있던 찰나 숫자 1이 사라졌다. 메시지를 쓸 때보다 더 떨리는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렸다. 그런데, 숫자 1이 사라졌는데 답장이 오지 않아서 나는 조금 더 기다릴까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 신호음이 한번 두 번 들릴 때마다 내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그러다 들리는 여보세요.


  그: 여보세요

  나: 네 여보세요 혹시 김ㅇㅇ씨 폰 맞습니까?

  그: 응 진영아

  나: 내 번호 바뀐 번호인데 내가 진영인지 어떻게 알아요?

  그: 내가 알고 있던 여자 중에서 대구 사투리 썼던 사람은 너밖에 없어서..

  나: 아~~ 그렇구나. 사실 지난주에 네이트온 몇 년 만에 다시 로그인해서 오빠 폰 번호 알게 됐고 바로 전화하려다가 혹시 결혼했을까 봐 바로 전화 안 하고 이메일 보냈어요. 근데 일주일 지나도 이메일 확인을 안 하는 거 같아서 조금 전 카카오톡을 보냈거든요. 오빠가 카톡 확인하고도 답장이 없어서 오빠 휴대폰 번호가 아닌 건가 싶어서 전화했는데 내 이름을 바로 부르길래 놀랬어요. 잘 지냈어요?


  그: 너한테 방금 카톡 답장 쓰고 있는 중이었는데 전화가 왔네. 그리고 이메일은 내가 몇 년째 확인 안 해서 메일 몇만 개 쌓여있을 거야.

  나: 혹시... 결혼했어요?

  그: 아직 안 했어.

  나: 근데 오빠 나 지금 좀 많이 아파요. 그래서 죽기 전에 꼭 한번 오빠 다시 보고 싶어서... 무작정 연락해 봤어요.

  그: 그랬구나. 안 그래도 네가 카톡 준 거 보고 많이 아픈 건가 걱정이 들었어. 근데 진영아 너 왜 갑자기 존대하니?

  나: 너무 오랜만이기도 하고, 오빠야도 이젠 아저씨 나이니까... 그럼 옛날처럼 다시 반말할게. 아무튼 나한테 이런 병이 올 줄 몰랐는데, 인생 참 그렇네...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길게 통화하지는 않고 전화를 끊었지만, 아직도 2015년 12월에 했던 통화 내용이 한 시간 전에 했던 것처럼 생생히 기억난다. 이후에 연락을 몇 번 더 하면서 드디어 내가 그 사람을 만나러 청주로 가게 된 날이 2016년 3월 7일.     


   3월 7일 월요일과 8일 화요일... 1박 2일에 걸쳐서 나는 청주에 다녀왔다. 3월 7일 월요일에 경북대학교에서 박경희선생님께 상담을 받고 오후 4시 반에 도착한 곳은 동대구역이었다. 그리고 바로 청주 오송역으로 가는 ktx를 탔다. 기차 안에서 참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집에는 교육학 특강 들으러 서울 갔다가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고 미리 거짓말을 해 놓고 나왔는데, 기차를 타기 전까지는 부모님께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기차를 타고나서부터는 미안한 마음보다는 오히려 홀가분하고 편했다. 그 사람 집에서 자는 것도 아무 걱정이 들지 않았다.  


   오송역에 도착하기 직전, 그 사람과 통화를 했고 주차장으로 오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아직 완벽하게 시력이 되돌아오지 않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오송역 주차장에서 그 사람을 찾아 헤맸다. 우리는 다시 통화를 했고, 나는 그 사람이 알려주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렇게 우리는 6년 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당시 나는 고용량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으로 몸이 부어있었는데, 이걸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살이 많이 찐 것처럼 보였을 거다. 이런 모습으로 그 사람을 다시 만나기 싫었는데 그래도 다시 보니 반가움만이 주위를 감쌌다.


   우리는 3월 초 추운 날씨에 오송역 야외 주차장에서 서로가 서로를 아무 말 없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 사람이 말문을 트면서 침묵이 걷어졌다.


  그: 진영이 많이 예뻐졌네.


   그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내 마음속으로는 '안 아팠으면 더 예쁘게 보일 수 있었는데...'라고 생각하며 그 사람의 차에 올라탔다. 그 사람의 동네로 가고 있는 차 안에서 뭘 먹을지 이야기했지만, 딱히 나는 먹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괜히 싱거운 농담을 했다. 바닷가재, 킹크랩, 스테이크 등등의 음식을 이야기했지만, 그런 것들이 먹고 싶어서 이야기한 건 아니었다. 그 순간 나한테는 그저 그 사람과 같이 먹는 게 중요한 거지, 뭘 먹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차는 그 사람의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한 후 그 사람과 같이 동네를 걷다가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순대국밥집으로 들어가서는 둘 다 순대국밥을 시키고, 그 사람은 일하고 와서 피곤하다며 소주를 시켰다.


   나에게도 처음엔 술을 권했지만,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먹지 않았고, 대신 소주잔에 사이다를 부어서 그 사람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2차로 맥주집으로 갔다. 나는 그때부터 맥주는 정말 마시고 싶어졌다. 병원에서는 다발성경화증으로 인해 술을 마시면 안 되는 건 아니라 했지만, 혹시 몰라서 맥주를 주문하기 전에 주사 담당 간호사한테 카톡으로 맥주 좀 마셔도 되냐고 물어봤다.

 

   맥주 몇 잔정도는 마셔도 괜찮다는 답장을 받고는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면서  반년만에 나는 맥주를 들이켰다.


   그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 사람이 나에게 6년 전보다 많이 성숙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땐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애기였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나는 그 사람이 나에게서 느끼는 것만큼의 달라진 느낌이 그 사람에게서 느껴지진 않았다. 그래도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긴 흘렀구나... 예전엔 그저 내 눈에 멋있어 보였는데, 지금은 그저 다 멋있게 보이진 않네...라는 생각이 들긴 해도 크게 눈에 띄게 달라진 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 사람과 나는 이성에 관한 이야기들,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달라지는 점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됐고, 그 사람 형이 아직 결혼을 안 했다는 말을 듣게 돼서 그럼 나랑 소개팅 약속을 잡아 보라고 내가 웃으며 말하자 그 사람은 11살 차이 괜찮겠냐고 물었다. 나는 바로 괜찮다 했고, 오히려 오빠야가 괜찮겠냐고 내가 반문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자신이 안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너한테 형수님이라고 하면서 존댓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냐며 웃었고, 나는 오빠야한테 도련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은 내 나이가 참 부럽다고 했다. 그때 자신이 못 해 본 것들이 생각나고, 그게 후회가 되니까 진영이 너는 그렇게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랑과 일을 둘 다 하는 게 참 어렵고 힘들긴 한데, 지나고 나니 그 순간 그 두 개를 다 하지 못했던 게 참 아쉽고 후회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건 둘 중에 하나만 하는 것도 참 어렵지 않냐고... 둘 다 하는 건 둘 다 놓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나도 일과 사랑 둘 다 하고 싶긴 하다고... 그렇지만 아직 자신은 없다고... 이런 말이 오가다 우리는 같이 또 웃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맥주를 한 모금씩 들이켜다 보니 어느 순간 내 맥주잔이 비게 되었고, 그 사람은 바로 내가 마실 맥주 한 잔을 더 시켜줬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애써 말리진 않았다. 그 사람을 보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모든 것들을 따지지 않고 바로 청주로 오게 된 것처럼, 그렇게 나는 그 순간을 아무 걱정 없이 조금 더 편하게 즐기고 싶었다. 6년 만에 다시 만난 첫사랑과 같이 맥주 한 잔 기울이는 이 순간은 앞으로 나한테 다시는 오지 못할 순간일 것 같으니까...      


    그 사람이 주문해 준 맥주 한 잔을 더 마시고, 나는 그 사람의 집으로 가게 됐다. 그 사람의 집으로 가기 전에 사람은 나한테 "진영이는 오빠를 믿을 수 있어? 남자 혼자 사는 집인데 겁도 없이 재워달라고 그래?"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 질문에 나는 "오빠야를 못 믿었으면 재워달라는 말을 먼저 하지도 않았고, 아파서 죽기 전에 한번 보고 싶어서 온 내가 뭐가 더 겁나겠어?"라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진영이 네가 내 방에서 자고 나는 거실에서 잘게"라고 그 사람은 말했고 우리는 같이 집으로 향했다.


   나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가지 않아서 그 사람이 본인 옷을 줬다. 예전의 나였다면 절대 그 사람의 집에 갈 수도 없었을 거고, 그 사람의 옷도 입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그저 아주 친한 사촌오빠 집에 간 것처럼, 아니 어쩌면 친한 사촌오빠 집이라 해도 조금은 불편했을 법도 한데, 그때는 왜 그리 편했을까...  왜 그저 내 집처럼 느껴졌을까...

 

   손이 보이지 않는 긴소매의 티셔츠와, 바지가 길어서 바닥에 끌리는 그 사람의 옷으로 나는 갈아입었다.


    이어서 그 사람은 냉장고 문을 열고 나에게 "요플레 먹을래?"라고 말하자, 나는 냉장고 안에 있는 사과를 보고는 사과가 먹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깎아 먹으라고 하자 "오빠야가 깎아주면 안 돼? "라며 나는 투정을 부렸고, 그 사람은 일어섰다. 내가 깎아 먹겠다고 하자 그 사람은 나를 한사코 말리며 나보다 본인이 더 잘 깎는다며 사과를 깎아줬는데, 사과 깎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 사과 깎는 게 보통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과 깎는 뒷모습을 보면서 '어깨가 참 넓구나, 어깨는 옛날이랑 똑같네'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모습이 옛날처럼 잠시 멋있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그 사람은 거실에 누워서, 나는 앉아서 잠시 나의 이야기를 하게 됐다.


    나는 그저 오빠를 한번 다시 보고 싶었다는 말을 서두로 내뱉었다. 더 늦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었다. 정말 죽기 전에 말이다. 내가 지금 당장 죽을병에 걸린 건 아니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정말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최근 들어서 아주 절실히 느끼게 되면서 빠른 시일 내에 꼭 한 번은 다시 만나고 싶었고, 그게 오늘이 될 줄은 나도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다고... 그런데, 이렇게 다소 무리를 감행해서까지 오늘 오게 됐다고...


   그러자 그 사람도 말했다. 얼마 전, 우리가 통화할 때 내가 죽기 전에는 우리 다시 한번 볼 수 있겠냐고 했던 말이 그냥 농담처럼 느껴지진 않았다고... 정말 그 말이 와닿았고, 인도 내가 한번 보고 싶었어서 막연하게 "그래 우리 한번 보자"라고 말한 거였는데, 막상 통화하고 며칠 뒤인 월요일 3월 7일에 내가 보자고 해서, 그 사람은 죽기 전에 우리 다시 한번 보자고 했던 나의 말이 절대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는 것을... 그래서 또 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줬다.


   나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젠 어제도 내일도 생각 안 하기로 했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중요하다고... 그래서 더 늦기 전에 꼭 보고 싶었다고... 그리고 오늘 나를 만나줘서 고맙다고 하니, 그 사람은  덧붙여서 말을 이어나갔다.


   며칠 전 우리가 통화할 때 진영이 네가 이젠 어제도 내일도 생각 안 하기로 했고 그건 중요하지 않으며 나에겐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소중하고 후회 없이 보내고 싶다고 했던 그 말이 본인의 마음에 참 와닿았다고... 그리고 이 말을 마지막으로 한 후 그 사람은 거실에 누워있던 그대로 잠이 들었다. 나도 그 거실 바닥에 누워서 잠시 잠들었다가 새벽 한 시쯤에 나는 잠에서 깼다. 

 

   여전히 거실 불은 아직 켜져 있었고, 나는 그 사람이 잠든 모습을 앉아서 가만히 바라봤다. 우리가 처음 알게 되었을 때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가만히 바라보기를 삼십 분 정도 흘렀을 무렵, 나는 그 사람의 방으로 들어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 처음 와 본 곳인데도 참 편하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그 사람이 머리 말리는 소리에 나는 잠이 깼다. 그러다 이제 좀 일어나 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와중에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 부리나케 일어나서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보니 그 사람은 없었다. 그 순간 잠에서 막 깨서 머리가 산발인 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고, 빨리 그 사람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신발 신을 겨를도 없이 맨발로 현관문을 뛰쳐나가 복도를 뛰어가니 엘리베이터 앞에 그 사람이 서 있었다. 내가 "오빠야"라고 부르자, 그 사람은 살짝 웃으면서 맨발인 나에게로 걸어왔다.


  나: 오빠야 이렇게 가면 안 돼. 인사는 하고 가야지. 잠시만 집 안으로 들어와 줘.

  그: 그래, 들어가자. 진영아 너 왜 신발도 안 신고 맨발로 나왔어?

  나: 오빠야 갔을까 봐...


   이렇게 우리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고, 그 사람은 현관 신발장 앞에 신발을 신은 채로 서 있었고, 나는 현관 바로 앞 거실 장판이 깔려 있는 곳에 서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 봤다.


  그: 지금 출근해야 돼서 나가봐야 되는데 너 혼자 두고 가게 돼서 미안해.

  나: 괜찮아.

  그: 어제도 잘 못 챙겨준 것 같아서 미안하네. 냉장고에 밥 있으니까 아침 챙겨 먹고, 쉬다가 조심히 내려가.

  나: 오빠야 어제 나 다시 만나줘서 고마워.

  그: 진영아 그리고 너 임용고시 준비했던 거 건강 괜찮아지면 다시 해 봐. 넌 왠지 임용고시 붙을 거 같아. 교사하면 잘할 것 같아.

  나: 응 고마워.

  그: 그래, 그럼 오빠 이제 출근할게. 또 봐.


   그 사람의 또 보자는 마지막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또 보자는 말에 나는 ‘우리가 과연 또 볼 수 있을까? 이게 마지막이야 오빠. 잘 지내.’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나는 잠도 아직 다 덜 깬 상태에서 두 눈을 아주 크게 뜬 채로 “오빠야 잘 가 안녕”이라는 말을 힘 있게 하며 손을 흔들자, 그 사람도 크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 사람의 마지막 뒷모습의 잔향이 상당히 오래 머물러 있어서 나는 그 자리에 선 채로 한동안 현관문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출근하고 나서 내 휴대폰 배터리가 얼마 안 남은 것을 확인하고 그 사람에게 연락해서 충전기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알려준 대로 찾아봤지만 충전기를 못 찾겠어서 결국 충전기 찾는 건 포기하고, 오전 열 시쯤에 나는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집주인도 없는 곳에서 혼자 아침을 차려 먹는 꼴이 참 웃기기도 했고, 그렇게 먹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갑자기 내 모습이 씁쓸하고 처량하게 느껴져서 목과 두 눈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전자레인지에 해동시킨 밥 한 그릇은 다 먹어야지... 남기면 안 되지 라는 생각에 혼자 웃다가 울다가 꾸역꾸역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마실 물을 찾아보니 어제 내가 거의 다 마셔버려서 마실 물이 없었다. 물은 끓여놓고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물을 끓이고 보리차 티백을 넣어서 물을 식히는 중에 어제 내가 먹다가 남겨 둔 사과를 마저 다 먹고 요플레도 하나 먹었다.


   어제 그 사람이 나한테 먼저 "요플레 먹을래?"라고 물었으니까 오늘 하나 먹어도 괜찮겠지 싶어서 먹었다. 냉장고 안에 요구르트가 너무 많이 쌓여 있어서 유통기한을 보니 4일이나 지난 거였다. 어차피 날짜 지난 거니까 여기에 더 있으면 버리기밖에 더 하겠나 싶어서 요구르트도 하나 마시고 설거지를 하는데 나도 참 웃긴다 싶었다. 지금 주인도 없는 집에 혼자 있으면서 챙겨 먹을 건 다 챙겨 먹는구나 싶어서 설거지하는 중에 웃음이 나왔다.


   설거지를 다 하고 집에서 나가기 전, 나는 그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원래 편지를 쓸 생각은 없었는데, 갑자기 쓰고 싶어졌다. 편지를 쓰려고 종이를 찾아봤는데 쓸 만한 종이가 보이지 않아서 결국 내 가방에 있던 책의 한 장을 찢어서 편지를 썼다. 여태까지 살면서 책을 찢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편지 한 장 못 남기고 가는 게 아쉬워서  여백이 있는 장을 찢어서 편지를 썼다. 나는 그때의 감정을 잊고 싶지 않아서 다 쓴 편지를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처량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이젠 이곳도 안녕이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고, 오빠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다시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생각 등등... 잠시 동안 여러 생각들이 엉켜서 나의 내면은 복잡해졌다.

 

   내 글씨로 가득 찬 종이 한 장을 그 사람의 방 안 배게 위에 두고는 그 집을 나섰다.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고 다시 한번 찬찬히 둘러봤는데, 하루 전의 일들이 왜 이리 오래된 것처럼 느껴질까...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왜 이리 몇 년 전보다 더 오래된 기억처럼 아련하게 느껴지는 건가 라는 생각에 잠시 잠기다가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정말 일장춘몽이라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라는 걸 새삼 느끼며 청주 오송역으로 향했다.


    기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가는 동안 눈물이 자꾸 흘러내렸다. 또다시 두렵고, 무섭고, 막막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걸까... 일박이일이라는 시간 동안 내 병과 나에게 처해진 여러 상황들,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해야 될 것들을 좀 잊게 됐는데, 다시 또 부딪히게 되는 현실로 가고 있는 그 순간이 참 힘에 부쳤다.


   기차 안에서 소리 못 내고 눈물만 계속 흘리고 있는 와중에 그 사람한테 전화가 왔다. 나는 그 상황에서 전화를 받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 받지 않았다. 그러자 그 사람한테 카톡이 왔는데, 나는 카톡도 확인하지 않았다. 이후에 그 사람한테 두  통의 전화가 더 왔지만, 그때는 휴대폰 배터리가 없어서 전화를 받지 못했다.


   대구에 도착해서 폰을 충전하고 감정을 좀 추스른 후, 일부러 아주 밝은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면서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고 잘 도착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오늘을 살아간다'라며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며 집으로 걸어갔다.      


그 사람의 집에서 나오기 전 쓰게 된 편지

   2016년 3월, 그 사람과 만난 이후 2018년 2월까지 나는 그 사람에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2018년 3월, 그 사람에게 나는 마지막으로 카톡을 보냈다. "오빠야 나 임용고시 준비 다시 해서 이번에 합격했어. 이 소식은 전해 주고 싶어서 연락했어. 오빠야 잘 살아. 나도 잘 살게. 안녕." 이 카톡을 보낸 후 내 폰에서 그 사람의 연락처를 지우고, 카톡 친구 목록에서 그 사람을 삭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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