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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낭만스럽게
Sep 23. 2023
2016년 2월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3월부터 임용고시 공부를 시작하려고 했지만, 다발성경화증 주사약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주사약 부작용이 상당히 심했다. 주사를 맞고 난 다음날이면 하루종일 극심한 두통과 근육통에 시달렸고, 심하면 오한까지 왔다. 이런 상황에서 임용고시를 준비하기엔 내 마음과 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집에 가만히 있기는 싫어서 취업사이트와 포털사이틀들을 둘러보던 중 경북대학교 교직원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물론 2년 계약직이긴 했지만, 국립대 교직원이면 계약직도 괜찮은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지원서와 자소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나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서 지원서와 자소서를 겨우 다 쓴 후 퇴고는 하지 못 하고 제출했다. 되면 좋고 안되면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부담감 없이 지원서와 자소서를 제출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서류 심사가 통과되었으니 그 주 금요일에 면접심사를 보러 오라는 문자를 받았다.
10년 가까이 음악만 해 왔던 나로서는 새로운 분야의 취업 준비가 아무것도 안 되어 있었다. 부끄럽지만 내가 지원서와 자소서를 썼던 부서에서 어떤 것을 하는지도 잘 모르는 상황이었고, 면접 당일 그곳의 홈페이지에서 비전과 목표를 확인하고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대충이나마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면접 복장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섰는데 그날따라 햇볕이 너무 뜨겁고 기온이 높아서 검은 정장을 입은 나는 면접 장소에 도착하기 전 이미 땀범벅이 되었다.
면접 시간보다 20분 정도 일찍 도착해서 지참한 서류를 제출하고는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바로 옆 테이블에 곱게 차려입은 여자가 다소 긴장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래서 이 사람도 면접 보러 왔구나 싶었고, 그 사람이 먼저 면접 보러 간 후 나는 그 테이블에 앉아서 과자를 먹었다. 어차피 떨어질 것 같고, 딱히 기대 안 하니까 과자나 먹고 가자 싶어 내가 안 먹어본 과자가 있길래 그걸 집어 들었다. 과자를 먹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맛있다’를 연발하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시간이 자꾸 다가오니까 점점 긴장이 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아무 준비도 못한 내가 되겠어? 그냥 편하게 보자'라고 생각했다.
내 차례가 되어서 면접장으로 가는 길에 안내해 주는 직원이 면접 전형을 소개해 줬다. 1차는 실무진 면접이고, 2차는 센터장님을 비롯한 위원장님들 면접이라는 말을 듣게 되자 ‘면접을 두 번이나 봐?’라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 한 상황에서 긴장한 기색으로 면접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면접관이 내 앞에 여덟 명이 앉아있는 것에 잠시 놀랐다. 일단 나는 중간에 앉아서 면접관의 질문에 대답을 하게 됐는데, 정말 솔직하게 소신껏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왜 임용고시를 준비 안 하는가? 한국사 시험은 임용시험 때문에 친 거 아닌가?라는 두 질문에 대해서는 사실대로 말할까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원래 임용고시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험 준비도 당연히 안 했었고, 한국사 시험은 친구들이 치길래 따라서 쳤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의 한국사 시험에 대한 대답을 들은 면접관들은 깔깔 웃었고, 나도 그 웃음에 전염되어서 깔깔 웃게 됐다.
마케팅에 대해서 아냐는 질문에는 “솔직히 마케팅 그런 건 지금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대답하자 면접관들은 또 깔깔 웃었다. 그리고 뒤이어 한 면접관은 “그건 뭐 들어와서 배우면 되고”라고 말했다.
이곳에 왜 지원했냐는 면접관의 질문에는 취업하려고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지원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다 1차 면접이 거의 마무리될 즈음에 어떤 면접관이 나한테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고 하길래 나는 웃으며 감사인사를 하자, 면접관은 또다시 웃는 게 예쁘다고 했다.
1차 면접의 마지막 질문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그 질문은 다름 아닌 10년 뒤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였다. 나는 그 질문을 받자마자 내 머릿속에서는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과연 내가 10년 뒤에도 살아있을까...’라는 거였고, 또 하나는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에라 모르겠다 이왕 망친 거 소신껏 대답하자라는 생각으로 “정말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10년 뒤에 저는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면접관들은 또 깔깔 웃으면서 연신 “그래 맞아, 그게 제일 어렵고 제일 큰 과제지”라는 말들이 이어 나왔다.
이 질문을 끝으로 1차 면접은 마무리되었다. 1차 면접관들은 내가 나가기 전 우리 센터는 이러한 업무를 하고 있다며 도리어 나에게 업무에 대해 소개해 줬고, 1차 면접에서 긴장 좀 풀렸을 거니까 2차 면접도 잘 보라고 말해 줬다.
2차 면접은 앞에 다섯 명의 면접관이 있었다. 중간에 앉아계신 분은 본인이 센터장이라 하시며, 나에게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라고 해서 나는 간단하게 소개를 했다.
이어서 2차 면접관의 질문과 나의 대답이 아래와 같이 오갔다.
면접관: 요즘도 작곡을 하나요?
나: 이제 작곡 안 합니다.
면접관: 음악 전공 하면 보통 교회 많이 다니는데 교회 다녀요?
나: 네
면접관: 교회 다니면 청년부 활동도 합니까?
나: 교회에 친한 언니 오빠들은 있지만 청년부 활동은 잘 안 합니다.
면접관: 힘들 땐 어떻게 풉니까?
나: 먹는 걸로 풉니다.
면접관: 주로 뭘 먹죠?
나: 빵이요.
면접관: 연봉은 얼마를 받고 싶나요?
나: 저는 대학교 교직원 연봉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서 금액으로 얼마를 말씀드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면접관: 일하다 보면 일이 많은 날도 있는데 그런 날에는 야근이나 밤새 일할 수 있어요?
나: 채용 공고문에 근무 시간이 09시부터 18시까지라고 되어 있는 걸 보고 지원해서 야근이나 밤새 일하는 건 자신이 없습니다.
면접관: 만약 일을 하게 된다면 언제부터 할 수 있어요?
나: 일을 하게 된다면 지금으로부터 한 달 반쯤 뒤인 6월부터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작년 연말부터 제가 많이 아파서 아직 휴식이 좀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나는 2차 면접의 질문에도 위와 같이 솔직하게 대답했는데, 내가 대답할 때마다 2차 면접관들은 1차 면접관들과 다를 바 없이 또 깔깔 웃었다. 그래서 나도 덩달아 같이 웃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입으로는 웃으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웃어도 되는 건가? 망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1차와 2차 면접을 합쳐서 한 시간 정도 면접을 봤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면접을 보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면접을 본 날로부터 한주가 지나서 박경희 선생님께 상담받는 날이 왔고, 상담 중에 지난주 면접 봤던걸 이야기했다. 면접은 망한 것 같다고 말씀드리던 찰나에 모르는 번호로 나한테 전화가 왔다. 박경희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아보니 지난주 면접 봤던 경북대학교 교직원에 최종 합격 되었다는 전화였다.
최종합격 전화를 받은 날로부터 며칠 동안 내 마음은 갈팡질팡했다. '계약직이긴 하지만 국립대 교직원이면 심한 반대는 안 하시겠지?'라는 생각으로 부모님께 경북대학교 교직원 채용 합격을 말씀드렸다. 그런데 부모님께서는 2년짜리 계약직이면 2년 후에는 뭘 할 거냐, 네가 2년 동안 일하다가 다시 공부하게 되면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 거 같냐 등의 이야기를 하시며 반대하셨다.
2016년 봄에 나는 공부가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고, 솔직히 하기도 싫었다. 아프고 나서부터 내가 생각해 왔던 계획들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임용고시를 치지 않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굳이 2016년에 임용고시 합격을 바라진 않았다. 그저 지난 몇 달 사이에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혼란스럽고 버거웠다.
최종합격 연락을 받고 며칠 안에 경력산정표를 작성해서 보내줘야 했는데, 경력산정표 작성은 했지만 보내는 것에 갈등이 생겼다. 그러다 결국 경력산정표를 보내지 않았다. 그다음 날 다발성경화증 치료제를 받으러 병원으로 갔을 때 2차 면접관 중 한 분이셨던 센터장님께 전화가 왔다. 왜 경력산정표를 내지 않는 거냐 입사 포기하는 거냐는 센터장님의 질문에 부모님께서 반대하신다는 말은 하지 않았고, 건강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서 죄송하지만 못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날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경북대학교 교직원 입사 포기가 아쉬울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내 길이 아니었겠지라고 생각하며 단념하려고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