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어: ○○역에서
[2052년]
가히 충격적인 영상이었다. `2022년 강남역에서`라는 영상을 보고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영상은 일종의 사회 실험 카메라였다. 어떤 임산부가 무거운 짐을 들고 힘겹게 강남역 계단을 오르자 주변 사람들이 짐을 들어주겠다고 도움을 자처했다.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것도 모자라 짐까지 들어주려 하다니! 2052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역사 선생님은 영상자료가 끝나자 이것이 과거 인류의 연대 정신이며 특히 우리나라의 `정`이라고 알려줬다. 정, 들어는 봤지만,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쉬는 시간에도 이 영상에 대해 토론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마라. 나보다 약한 사람은 멀리하라. 내가 모두를 책임질 수 없다. 다 초등학교 때 배우는 상식인데, 영상에 나온 사람들은 모두 이 당연한 상식을 어겼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득과 실`이라는 과목을 배운 우리와 `도덕` 같은 수업을 들은 그들은 뇌 구조부터 다른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2052년 버전 강남역에서`를 촬영하기로 했다. 선생님 말씀대로 인간이 원래 연대하는 동물이라면, 현재도 그 본성이 어떻게든 남아있을 것이다.
방과 후 나와 친구 영훈이는 정의 마지막 발견 장소인 강남역에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그 실험, 계단이 있어서 가능했던 거 아닐까?" 영훈이는 현재 강남역에 계단이 남아있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이동 레일밖에 없어서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실험은 불가능했다. 아무래도 정의 비결은 계단이었을까. 우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형, 뭐해?" 그때 학원으로 향하던 동생 승현이가 보였다. 공부에 소질이 없는 나와는 다르게 승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득과 실` 과목에서 백 점을 맞았다. 엄마는 곧장 승현이를 영재학원에 등록시켰다. 그래서 10살임에도 불구하고 온종일 학원에서 수업을 들었다. 승현이의 손목에서 빛나는 미아 방지용 스마트워치를 보자 우리의 눈이 반짝거렸다. 만 13세까지 외출 시 무조건 착용해야 하는 스마트워치를 놓고 왔고 길을 잃어버렸다고 얘기하면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승현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유튜브 수익의 반을 나한테 주겠다는 거지?" 승현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좋아.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대신 나 경고 뜨기 전에 끝내." 승현이는 스마트워치를 풀어 나에게 넘겼다. 스마트워치는 미착용 상태로 30분이 지나면 자동으로 경찰에 신고됐다. 우리는 30분 안에 인간의 정을 담겠다는 굳은 의지로 스마트폰을 들어 올려 저 멀리에 있는 승현이를 줌인했다.
강남역 9번 출구에서 승현이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 자체가 드문지라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아는 아이인가 승현이 얼굴을 열심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30분이 지나면 경찰이 올 거라고 알려줄 뿐이었다.
"제가 스마트워치를 잃어버려서요. 혹시 저희 엄마한테 연락을 좀 할 수 있을까요?" 승현이의 간곡한 부탁에 바쁘게 걸어가던 한 중년 남자가 멈추어 섰다. 그는 멈춰 서더니 승현이에게 몸을 낮췄다. "그래. 좋은 생각이구나. 엄마 번호를 불러주렴." 우리는 감격했다. 인류의 정은 2051년에도 남아있었다. "조회수 천만각이야." 영훈이가 속삭였다. 우리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이제 이 모든 게 실험 카메라였다고 말할 차례였다.
"여보세요? 지금 아이가 스마트워치를 잃어버려서 저와 함께 있습니다. 빨리 와주세요. 아니 그 중요한 걸 안 챙기면 어떡합니까?” 남자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엄마에게 전화하고 있었다. 승현이는 불안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2112년]
가히 충격적인 영상이었다. `2052년 강남역에서`라는 영상을 보고 내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스마트워치를 잃어버린 아이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한 중년 남성이 그 아이의 부모님에게 연락하고 찾으러 올 때까지 옆에서 기다렸다. 남자는 계속해서 툴툴대고 아이를 꾸짖었지만, 혹여나 아이가 추울까 봐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 둘러줬다. 모르는 사람과 함께 기다려주는 건 물론, 목도리까지 내어주다니. 2112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정, 들어는 봤지만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참 이상해. 나는 중얼거리면서도 가슴속 무언가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