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신춘문Ye

환생신청서

신춘문Ye

by Ye



다음 단어나 말 가운데 세 가지 이상을 포함시켜 자유롭게 작문하시오.

1) 미나리

2) 민주주의는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행동이다

3) 최고 아닌 최중으로 살자

4) 신났네 신났어

5) 저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환생 신청서」


저는 개였습니다. 생전에 흰 털을 가진 말티즈였죠. 생후 3개월쯤 됐을 때 형이 저를 무작정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엄마랑 아빠는 털 날린다고 어린 저를 어찌나 구박하던지요. 그때 결심했죠. 언젠간 꼭 이 집안 최고 서열이 되고 말겠다고요. 매일 이를 갈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엔 소파 다리를 다 갉아먹었다고 또 화를 내더군요. 아무튼, 시간이 지날수록 아빠는 제 귀여움에 빠져들었고, 엄마가 안 볼 때 몰래 뽀뽀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엄마만은 아직도 못마땅한 표정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치킨 뼈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가족들이 먹고 남긴 치킨을 몰래 훔쳐먹었는데 소화가 안 돼서 죽을 것 같았습니다. 엄마한테 혼날까 봐 숨어있었는데 배가 점점 아팠고 숨쉬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나선 기억이 잘 없는데, 엄마가 저를 안고 병원으로 뛰어간 것만은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제가 깨어났을 때, 엄마는 말없이 저를 꼭 안아줬어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엄마가 매일 산책을 시켜준 게.



저는 하루 중 새로운 냄새를 확인하고, 엄마와 발맞춰 걷던 그 시간이 제일 좋았습니다. 가끔 가족들 다 같이 산책하러 나가면 엄마는 평소보다 들뜬 저를 보고 신났네 신났어라며 서운해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얘 덕에 우리 가족이 자주 모인다, 복덩이라며 저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때 결심했습니다. 최고 아닌 최중으로 살자. 서열 1위의 꿈은 포기하고 중간에서 가족들을 모두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다들 제가 맹목적인 충성을 했다고 하는데, 제가 낯설어할 때, 힘들 때, 먼저 손 내밀어준 건 가족들이었습니다. 가족들은 제게 맹목적인 사랑을 줬습니다. 제가 손, 앉아, 엎드려만 해도 대견해했고, 슬퍼할 때 곁에 앉아만 있어도 위로받고 기운 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털이 빠지고 야위어 가는 저도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했습니다. 저를 항상 과격하게 들어 올리던 형은 어느새 제 옆에 가만히 앉아서 한참 동안 곁을 지켜줬습니다. 그럴 때면 철든 형이 대견했습니다. 가만 보면 제가 가족들의 언어를 배운 게 아니라, 가족들이 저의 언어를 배운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떠난 지 5년이 됐는데도 엄마의 핸드폰 배경화면은 여전히 제 사진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사진첩을 뒤지면서 눈물을 훔칩니다. 엄마가 우는데 곁에 있어 줄 수 없어 슬퍼요.



힘들게 얻은 환생 기회인 만큼 이번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면 치킨도 마음껏 먹고, 혼자서 산책해보고 싶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아빠가 탁자 밑으로 몰래 주던 치킨 살코기와 엄마가 매일 시켜주던 산책이 너무 그립습니다. 저는 저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신 청 자 : 별이

신청자 서명: 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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