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국의 '순교자'를 읽고 쓰다.
“목사님의 신, 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누구나 자신만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산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은 각자 살아온 환경이 달랐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힘든 일도 다 다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실패를 겪거나 하는 것들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은 겪어야 하는 일이고 우리에게 절망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거대한 변화 때문에 그렇다면 무기력감은 더 커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절대적인 존재를 찾는데, 오늘 말할 ‘신’ 역시 이 존재들 중 하나에 속할 것이다.
소설은 6.25 전쟁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국군이 평양을 점령한 후 그곳을 관리하고 있을 때, 평양에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있었다. 주인공 이 대위는 장 대령의 부하로 평양에 들어가 임무를 수행하는 데, 그 임무란 것은 바로 신 목사라는 사람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사실 신 목사와 한 목사라는 사람들은 국군이 평양을 수복하기 전, 그들을 포함한 14명의 평양 목사들 중 유이하게 살아남은 목사들이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장 대령은 주인공에게 이들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처음에 난 이 소설이 추리소설인 줄 알았다. 장 대령, 이 대위, 그리고 그의 친구이자 군인인 박인도는 모두 각자의 목사들의 사망사건에 대한 의문점이 있고,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하지만 결국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열쇠를 가진 사람은 신 목사였다. 목사의 증언에 따라 하나씩 밝혀지는 진실들과 사건의 전말은 책을 읽으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요소들 중 하나였다. 빠른 이야기의 전개,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익숙함 역시 읽는 재미를 더했다.
하지만 결국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은 바로 맨 위의 질문이었다. 이 대위가 이 질문을 신 목사에게 던짐으로써 모든 사건이 전개된다. 작중 신 목사는 거짓말을 한다. 첫 거짓말은 그가 다른 목사들의 처형 장면을 보지 못했다는 거짓말이었다. 장 대령과 이 대위가 캐물어도 말을 하지 않다가 나중에 신문기사에서 그 진실이 밝혀짐으로써 목사의 거짓말은 탄로 난다. 두 번째 거짓말은 자기가 그들을 배반했으며 처형당한 목사들이 마지막 순간에 기독교인으로서 명예롭게 순교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 대위와 장 대령이 전말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에게 이와 같이 설교했다.
이 대위는 목사가 왜 진실을 말하지 않는지 궁금해했고, 그의 행동에 대해 소설 내내 의문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말미에 신 목사와 이 대위의 대화 속에서 그들의 갈등이 해소된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신 목사는 신에 대해 회의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고통받는 인간, 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전쟁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고향이 공습에 의해 폐허가 되고 사랑하던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으며,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배고픔과 추위에 떨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상태에서 그들은 무엇에 의지해야만 했을까. 답은 절대적인 존재, 신에게 의지하는 일뿐이었다. 전쟁의 피난민들과 시민들은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주일에 모여 찬송하고 사람들과 만나면서 그들은 아마 희망을 찾고 미래를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모습들 때문에 신 목사는 고뇌했을 것이다.
고통을 주는 진실, 안식을 주는 거짓 중 하나를 정해야 한다면 나는 무슨 선택을 할까. 진실과 거짓을 저울질하는 3명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선택을 했다. 장 대령은 국가적인 이익과 선전을 이유로 진실을 감추는 것을 택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신 목사만이 알고 있는 사건의 비밀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대위에게 있어서 어떤 이유로든 간에 진실을 무시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결과에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밝히고 그다음 문제로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소설에서 장 대령과 이 대위는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이런 이 대위는 마찬가지로 신 목사의 거짓말에 대해서도 불편한 의문을 품는다. 신 목사는 교인들이 각자의 십자가를 짊어질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었다. 교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광풍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의미 있게 하고 그들이 겪었던 고난들을 값진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 어떤 것이었다. 굳이 이들을 절망에 빠뜨려야 했을까?
나는 신 목사가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평양에 있던 교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자신을 따르는 교인들이 무의미의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최후의 순간까지 그들과 함께했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절망을 끌어안고 살아야만 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질 수 없었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무게를 견뎌야 하는 사람이었다. 이 대위는 신 목사의 진의를 파악한 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 역시 전쟁 속 수많은 군인 중 한 사람이었고, 전쟁터를 돌면서 사람을 죽였다. 그래서 자신이 행한 모든 일에 대해 회오의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목사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영원한 천국, 그리고 유다를 줘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너무나 쉽게 야만과 절망으로 빠질 수 있는 동물인 것 같다. 나는 내가 과연 전쟁 같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이성을 가지고 살 수 있을지 생각해봤다. 모든 것이 참담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 신을 찾지 않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또 주변에 넘쳐나는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일들 가운데서 나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을 떨쳐내고 살아갈 수 있을까? 신의 존재가 사실이든 아니든, 사람들이 신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주변에 교회를 다니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다시 활기를 되찾아 가는 분들을 본 적이 있다. 그들에게 신은 없다고, 삶은 무의미와 고난의 연속인 것이라고 대놓고 일갈할 수 있을까? 못할 것 같다. 절망은 유한한 인간의 삶에 있어 질병과 같고, 희망은 그것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설사 희망이 이 대위의 말처럼 단순한 환상에 불과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