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의 '광장'을 읽고 쓰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졸지 않은 분들은 한 번이라도 '광장'이라는 소설을 들어봤을 것이다. 그들은 남과 북 어느 곳에서도 희망을 찾지 못한 주인공 '이명준'이라는 남자가 결국 중립국으로 배를 타던 도중에 바닷속으로 뛰어든다는 줄거리를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혹은 소설 속에서 이명준을 설득하려고 남한 측과 북한 측에서 각자 회유하려고 하지만, 오직 '중립국'이라는 말로 단호함을 표현하는 장면과 그 패러디를 보고 이 소설을 접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 광장을 접한 케이스는 후자였다. 인터넷에서 아무리 담임 선생님이 수시로 하향 지원을 하자고 설득해도 정시를 준비하겠다는 학생의 이야기로 패러디한 글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광장이 무슨 내용인지 몰랐는데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원작이 유명할수록, 패러디는 그만큼 많아진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왜 유명해졌을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소설이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문장력으로 독자를 압도하는 것이 아닌 시공간을 넘어서 모든 사회에 불쏘시개를 던지는 작품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광장은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작가가 살던 시대는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지금과 달리 전쟁의 상흔이 생생하게 남아있고, 상처의 수만큼이나 정치적인 민감도는 높았을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힘이 사회 전반에 뻗칠 무렵이 바로 '광장'이 탄생했던 것이다. 공산주의의 기치 아래서 으르렁대는 나라와 마주하는 또 다른 나라의 정치적 자유가 얼마나 보장되었을까. 아무런 잘못이 없는 이명준은 자신의 아버지가 북한에 있다는 이유로 의심받아 공안 형사들에게 끌려갔다. 철학을 전공한 그에게, 형사는 자신이 이명준과 같은 자들의 특징을 잘 알고 있다며 그를 빨갱이 취급한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 질려버린 그가 북한에 가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스티유의 노여움과 기쁨, 동궁 습격의 아슬아슬함, 기요틴에서 흐르는 피를 그저 풍문으로 접한 사회의 인민들은 그저 경직된 자세로 박수만 치고 있었다. 소위 '혁명'이 일어난 곳에서 사는 인민들은 당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당의 필요에 따라 흥분하는 척을 했다. 그는 북에서 고위 관리로 잘 살고 있는 아버지를 만났지만,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의문에 대해 아무런 답도 얻지 못하자 중립국으로 떠난다.
"...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라구, 인민의 혁명이 아니라구요. 저도 압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때 프랑스 인민들의 가슴에서 끓던 피, 그 붉은 심장의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중략) 편집장은 저한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명준 동무는, 혼자서 공화국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하는군. 당이 명령하는 대로 하면 그것이 곧 공화국을 위한 거요. 개인주의적 정신을 버리시오' 라구요. 아하, 당은 저더러는 생활하지 말라는 겁니다. 일이면 일마다 저는 느꼈습니다. 제가 주인공이 아니고 '당'이 주인공이란 걸. '당'만이 흥분하고 도취합니다. 우리는 복창만 하라는 겁니다. '당'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한숨지을 테니, 너희들은 복창만 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일찍이 위대한 레닌 동무는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위대한 동무들에 의하여, 일찍이 말해져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아무 말도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인제 아무도 위대해질 수 없습니다." (최인훈, '광장' 中)
결국 이명준은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쉬는' 바다에 몸을 던진다.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은혜를 뒤로하고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에서 그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두 마리의 새를 보고 결심을 내린다. 전쟁 도중에도 만나서 사랑을 나누던 은혜는 자신이 명준의 아기를 가졌다고 했지만, 결국 그들의 미래는 포성과 함께 어그러지고 말았다. 그런 이명준의 자살에는 두 가지 해석으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아기를 가진 채 전사한 은혜가 갈매기로 환생해서 배까지 왔음을 깨닫고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 몸을 던졌다, 가 될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명준은 '무덤을 이기고 온, 못 잊을 고운 각시들이, 손짓해 부른다.'라고 독백한다. 두 번째는 조국의 절망스러운 현실 때문에 그가 자살했다는 해석이다. 남과 북의 모든 회유를 뒤로하고 배에 탄 그는, 비록 중립국에 가서 새로운 삶을 살리라 다짐하고 그곳의 일상에 대해서 상상했더라도, 어렴풋이 자신의 자살을 예견하고 있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해석 중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광장'이 앞으로도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위대한 소설은 시공간을 넘어 모든 사회에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불쏘시개를 던지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북한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광장이라는 소설은 계속해서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정 선생과의 대화에서 이명준은 한국의 정치에 대한 비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정치의 본성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여당을 공격하기 위해 정의를 자처하는 야당이 매 정권마다 존재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고, 그렇게 얻은 이미지를 바탕으로 얻은 권력 속에서 각자의 배를 불리는 모습이 몇 십 년 뒤에도 나타나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없다. 그들이 원하는 미래를 그리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로 할 것이다. 다만 그 희생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서라도 이 소설은 읽힐 것이다.
"한국 정치의 광장에는 똥오줌에 쓰레기만 잔뜩 쌓였어요. 모두의 것이어야 할 꽃을 꺾어다 저희 집 꽃병에 꽂구, 분수 꼭지를 뽑아다가 저희 집 변소에 차려놓구, 페이브먼트를 파 날라다가는 저희 집 부엌 바닥을 깔구. 한국의 정치가들이 정치의 광장에 나올 땐 자루와 도끼와 삽을 들고, 눈에는 마스크를 가리고 도둑질하러 나오는 것이지요."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