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세느강 건너

미라보 다리 위에 사랑이 흐르고

by 에투왈

빠리에서의 두 번째 아침.

몸보다 먼저 깨어난 건 마음이었다.

숙소 문을 나서자, 아직 덜 깬 도시의 공기가 가볍게 폐로 스며들었다. 조용한 새벽 버스를 타고 강변을 따라 달리다 보니, 차창 너머로 퐁네프 다리가 보였다.

프랑스어로 ‘퐁(pont)’은 다리, ‘느프(neuf)’는 새롭다는 뜻이다.

퐁네프 다리 라고 하면 역전앞 같은 거라고 할까.

당시엔 새로운 다리가 지금은 빠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8_612Ud018svc60andxa7mpfo_bxeu2s.jpg?type=w520 * 르 퐁뇌프, 오귀스트 르누와르, 1872


이 그림은 인상파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1872년, 빠리의 가장 오래된 다리 ‘퐁뇌프’를 그린 작품이다. 인물들의 윤곽은 흐릿하고, 색채는 살아있다. 정확하게 그려진 얼굴은 없지만,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사람들의 생기가 있다. 르누와르는 1874년 제 1회 인상주의 전시가 열리기 전 이 그림을 그렸다. 그렇지만, 눈에 비친 순간의 인상, 찰나의 생동감,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적인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바로 인상주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세느강의 또 다른 다리 생각났다.

기욤 아폴리네르는 사랑하던 연인과 헤어지며 이 시를 썼다.

대학생 시절 학교 옆을 지나던 조그만 개천을 우리는 세느강이라고 불렀고 그 위의 다리를 미라보 다리라고 불렀던 기억이 났다. 왜 세느강이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많은 다리들 중에서 왜 미라보 다리라고 했을지는 유추가 된다. 아마도 그 다리 위를 걸으며 사랑이 싹트길 바라서였을까.


< 미라보 다리 >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우리 사랑을 나는 다시

되새겨야만 하는가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왔었지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잡고 얼굴 오래 바라보자

우리들의 팔로 엮은

다리 밑으로

끝없는 시선에 지친 물결이야 흐르건 말건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사랑은 가 버린다 흐르는 이 물처럼

사랑은 가 버린다

이처럼 삶은 느린 것이며

이처럼 희망은 난폭한 것인가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나날이 지나가고 주일이 지나가고

지나간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는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물 위엔 사랑이 흐른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껴안은 다리 위를

나는 지금, 천천히 걷고 있다.


Signac_-_Le_pont_des_Arts_-_P2286_-_Musée_Carnavalet.jpg 폴 시냐크 : 파리, 예술의 다리 II, 1928



<빠리 바게뜨> 빵집이 정말 빠리에?


버스는 생 미셸 분수 앞에서 나를 내려주었다.

빠리의 아침 공기 속을 천천히 걸었다.

그리 크지 않은 거리, 조금은 느린 걸음이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낯선 도시에서 만난 반가운 간판


시테섬을 벗어나려는 순간, 나는 뜻밖의 간판을 마주했다.

한국의 '빠리 바게트'가 있었다. 세련된 간판에 멋진 건물에 들어선 모습에 자랑스럽고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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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거리에서는 일상처럼 지나쳤던 그 제과점이 지금 빠리 한복판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 오늘, 내가 꼭 가고 싶었던 곳.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

‘셰익스피어와 그 친구들’이라는 뜻의 이 서점은,

1964년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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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포 선셋(Before Sunset)》에 등장하며 더욱 유명해진 이 서점은, 사실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예술가들과 작가들의 은신처였다. 제임스 조이스는 이곳을 마치 자신의 사무실처럼 드나들었고, 그의 걸작 『율리시스』는 바로 이 서점에서 출판되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움직이는 축제』에서도 이 서점에 대한 추억을 언급한다. 가난하던 시절, 주인 실비아 비치는 그에게 책을 빌려주며 아낌없이 환대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F. 스콧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 T. S. 엘리엇, D. H. 로렌스…

심지어 로렌스의 논란 많던 『채털리 부인의 연인』도 이곳에서 조용히 다루어졌고,

만 레이와 막스 에른스트 같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도 이 작은 공간에 들렀다.

이 서점은 단지 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예술가들의 성소였던 것이다.


나는 조용히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책을 고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래된 나무 서가와 책 냄새, 그리고 이 공간에 스며든 시간의 향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가 사이를 거닐며, 마치 거장들의 숨결이 아직도 공기 속에 머물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다음 여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아쉽게도 잠시 머물다 나왔다.

다음에 빠리에 다시 오게 된다면, 나는 꼭 그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 낡은 책들로 둘러싸인 조용한 의자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무 말 없이 오래도록 깊은 명상에 잠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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