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빠리 미술관 산책

뮤제 독세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by 에투왈


아침의 기억과 프루스트

빠리에서의 세 번째 날이 밝았다. 숙소를 나서자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아침 햇살은 아직 희미했지만, 도시는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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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나는 숙소 1층의 스타벅스에 들렀다. 커피를 주문했지만 엉뚱한 음료가 나왔고, 순간 당혹스러웠으나 따질 상황은 아니었다. 즐겁게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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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따뜻한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무심히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의 빠리 풍경과 그녀의 웃음이 겹쳐 들어왔다. 마치 이 순간이 하나의 작은 영원으로 고정된 듯했다. 유리창에 비친 모습과 테라스의 불빛, 그리고 그 뒤로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의 실루엣이 겹쳐져 마치 그림 속 한 장면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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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문장이 떠올랐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데 있다.”
내가 보고 있는 지금 아내의 모습이 그랬다. 수없이 보아온 얼굴인데, 빠리 속에서 전혀 새로운 인물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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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다른 구절이 겹쳐 떠올랐다.

“긴 밤을 뒤척이다가 눈을 뜬 순간 몇 달 전 다른 나라에서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추억이, 내가 살았을지도 모르는 곳에 대한 추억이 저 높은 곳에서부터 구원처럼 다가와 나를 구해 주었다.” 아내의 사진을 찍던 그 찰나가 바로 그러했다. 빛과 공기, 웃음과 풍경이 한데 얽혀 하늘에서 내려온 추억처럼 내 기억을 끌어올렸다.

나는 이제 빠리의 거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억과 현재, 그리고 오래된 문장의 여운이 겹겹이 교차하는 순간 속에 있었다.

카루젤 광장에서 오르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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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발걸음은 카루젤 광장으로 이어졌다. 돌기둥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한때 황제의 행렬을 비추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광장은 아직 이른 아침의 정적을 품고 있었고, 나무와 돌길 사이로 스며드는 빛은 새로운 하루의 서막처럼 느껴졌다. 저 멀리 뛸릴리 정원 너머로 뻗은 샹젤리제가 보였고, 그 끝에 개선문이 있었다. 반대편으로는 루브르와 피라미드가 고요한 직선 위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 길은 빠리라는 도시의 심장에 새겨진 긴 역사의 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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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세느강 다리에 올랐다. 물결은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부서지고 있었고, 강 위를 스쳐 가는 바람은 아직 차가웠지만 그 속에 봄의 기척이 섞여 있었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 뒤를 돌아보았다. 루브르의 긴 벽과 피라미드가 강 건너편에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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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자 뮤제 독세의 거대한 외벽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 기차의 굉음을 삼켜내던 역, 지금은 인상파의 빛과 색이 머무는 집. 다리를 건너며 나는 두 시선을 동시에 느꼈다. 과거의 열차가 힘차게 달려오던 풍경, 그리고 지금의 나를 기다리고 있는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드가의 발레리나.


오르세 광장에 도착했다. 긴 여정의 피로는 아직 남아 있었지만 마음은 한없이 가벼워졌다. 오늘, 나는 이 시계 속에서 다시 과거로의 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입구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문득 오래된 역의 플랫폼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계 속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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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가 되자 문이 열렸다. 나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가장 먼저 락커에 짐을 맡기고 곧장 5층으로 올라갔다. 바로 시계탑 앞, 뮤제 독세의 상징 같은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잠시만 늦어도 사람들이 몰려들어 온전히 시간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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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시계창 앞에 섰을 때, 그 너머로 세느강과 빠리의 지붕들이 투명한 빛 속에서 겹쳐 들어왔다. 나는 그 풍경을 배경 삼아 아내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속에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가 깃들어 있었다.


그때, 내 여정의 이름이 떠올랐다. ‘뮤제 독세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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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을 마치고 발걸음을 돌리자 곧바로 마주한 것은 19세기 최초의 모더니스트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들이었다. 그의 그림은 여전히 신선했다. 낡은 아카데미 화풍과 단절하고, 현대 미술의 문을 열어젖혔던 화가의 숨결이 그곳 벽면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순간, 나는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려온 또 다른 나를 마주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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