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여유로운 토요일, 뭔가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밥퍼 봉사 소식을 듣고, 홀린 듯 이끌렸다. 한 여름 장마처럼 장대비가 내리는 아침, 바람은 가을이 오려는 듯 시원해졌다. 서둘러 길을 나서 청량리역에 하차했다. 깜짝 놀랐다. 내가 알던 그곳이 아니었다. 상전벽해,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 사잇길을 지나자 굴다리가 보였다.
그곳은 나의 아픈 추억의 장소였다. 4살쯤 길을 잃은 나는, 굴다리 아래 멍게장수 옆에서 발견됐다. 맞벌이 부모님은 즉시 나를 강원도 외갓집으로 보냈고, 나의 타향살이가 시작된 장소였다. 그 굴다리 위로 놓인 철도길은 동네를 양쪽으로 갈라 놓았다. 굴다리 아래도만 이쪽과 저쪽이 왕래할 수 있는 것이엇다. 밥퍼본부는 그 굴다리를 지나자 곧 보였다. 주상복합단지 안과 밖은, 마치 내가 어릴 때 보았던 1970년대에서 50여 년을 훌쩍 뛰어넘은 듯,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밥퍼는, 이 땅에 밥 굶는 이 없는 세상을 위해 1988년에 시작된 무료급식 공동체이다. 대학 동기들끼리 모인 85 봉사단은 올해 5월부터 밥퍼 봉사를 시작했고 나는 처음 참가했다. 고대 집짓기 동아리(고집) 재학생 후배들과 함께 참여하게 되어 의미가 깊다. 늦은 나는 허겁지겁 밥퍼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이미 역할은 나누어 재료준비와 음식 만들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멸치 다듬는 팀에 추가 인원으로 배치되었다. 멸치 대가리와 몸통을 분리하고 내장을 발라내는 일이었다. 재익이 성용이와 함께 이야기 꽃을 피우며 숙달된 동작으로 멸치를 다듬었다. 배식봉사자 중에는 70~80대 할머니, 할아버지 몇 분도 계셨는데 열정적인 모습에 감탄했다.
식사준비가 끝났고 어르신들이 식당 안을 가득 메우셨다. 밖에도 줄이 길게 늘어섰다. 점심은 보통 400~500분 정도의 노인께서 오신다고 한다. 밥에는 약간의 잡곡이 섞여 있었는데 구수한 밥맛이 풍겼다. 무료 식사인데 자발적 기부도 받고 있었다. 주로 백 원짜리 동전이었다. 오늘은 비가 내려서 인지 380여분께서 식사를 하셨다. 식사는 맛있게 잘 드셨지만 어르신들은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고 분위기가 가라앉고 쓸쓸해 보여 마음이 아팠다.
한 친구가 말했다.
"요즘은 경제적인 사정뿐 아니라 혼자 밥 해 드시고 힘들고 외로운 독거노인들도 오시면 좋겠다"라고. 공감되는 말이었다.
식사를 기다리는 어르신들을 만나러 밥퍼 설립자 최일도 목사님이 들어오셨다. 손에는 방금 나온 신문이 들려 있었다. 한겨레 S 커버스토리, 뒤죽박죽 행정에 ‘님비’ 현상까지… 소외된 이웃 품던 ‘밥퍼’ 어디로?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집에 와서 기사를 읽었다.
"1988년 라면으로 시작된 밥퍼의 나눔이 존폐의 위기에 처했다. 과거 부실한 행정처리와 최근 주민과의 갈등이 얽혀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의 댓글에는 찬반으로 의견이 엇갈렸다.
"밥퍼에 와야 말 한마디라도 하지!"라는 한 할머니의 말씀과 "밥퍼 후원금이 종교를 위해 쓰인다"라고 주장하는 반대의 소리가 섞여 있었다.
얼마 전 기분 좋은 뉴스를 들었다.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처음으로 일본을 추월했다. 인구 5천만 이상 국가들 중에서는 전 세계 6~7위권에 올라섰다. 그럴수록 소외되고 외로운 이웃에 대한 배려가 더 좋아져야 하지 않을까. 초연결사회에 점점 커져가는 외로움. 영국에는 외로움 장관이 있고, 일본은 고독담당 장관이 임명했다. 이제 우리도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정부나 지자체에서 할 일을 민간에서 대신 맡고 있는 이곳이 없어지는 일은 없길 바란다.
밥퍼의 맛있는 밥맛이 벌써 그립다. 다음 친구들과의 모임은 밥퍼에서 하기로 마음먹었다.
봉사도 하고 맛있는 밥도 먹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