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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석환 Jun 12. 2022

얼떨결에 발 들인 연극, 매력에 빠져 33년

경남배우열전 (6) 창원 극단 미소 고대호 배우

"배우님, 저 지금 지하 건물 안에 들어왔는데요." 전화로 주고받은 얘기지만, 수화기 밖에서도 그의 답변이 들렸다. 사무실 문을 열었더니 입구 앞에 앉아있던 고대호(56) 배우가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기자가 제대로 찾아오지 못할까 봐 문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명함을 건넨 뒤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그가 의아하다는 듯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에이∼ 우리 처음 아니잖아요?" "아, 네, 그…. 우리 회사에 최환석 선배가 있는데, 저는 최석환이라고 합니다." 그의 입에서 '아∼'라는 짧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기자가 지난 11일 찾은 극단은 고 배우가 대표로 있는 창원지역 연극단체다. 이날 만난 고 배우는 올해로 창단 서른세 돌째를 맞은 극단 미소 창단 멤버 중 한 명으로, 미소에서만 30여 년째 활동 중인 중견 연극인이다. 경력만 놓고 보면 어려서부터 연극인을 꿈꾸던 사람 아니냐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는 창단 전까진 연극에 아무런 뜻이 없었다. 철강업계 노동자였던 그는 우연한 계기로 극단 창단에 참여했고, 그 전후로는 한국철강에 다니면서 기획자로 활동했다. 평상시에는 현장직 노동을, 퇴근 후에는 공연 기획을 도맡았다.


"천영훈 도파니아트홀 대표와 장은호 창원연극협회 지부장, 지금은 김해에서 사업하는 김영일 씨 이렇게 넷이서 극단 미소를 1989년 6월에 만들었어요. 장은호 씨와는 그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그때 극단 사람들과도 인연이 닿은 거예요. 극단을 만들어보자는 얘기가 나와서 얼떨결에 발을 들이게 된 건데, 창단 전까지는 한 차례도 무대에 서본 적이 없었어요. (웃음)"

창원 극단 미소 고대호 배우.


철강노동자, 극단 창단멤버로
기획자서 연기자로 40여 편
지난해 경남연극제 연기대상



극단에서 기획자로 일을 시작했지만, 이내 무대에도 올랐다. 우연한 기회로 연극 <카덴자>(이현화 작·이성숙 연출)에 참여해 1990년 처음 무대에 섰다. 대사가 거의 없는 망나니 역을 연기했다. 연극에 재미가 더 붙을 때쯤, 그는 한국철강을 그만뒀다. 극단 창단 1년 만의 일이었다. 그런 그를 부모는 반대하지 않았다. 회사 시절 노동운동을 했던 고 배우를 걱정한 부모는, 연극을 하면 적어도 경찰에 잡혀갈 일은 없을 거라고 판단해 뜻을 꺾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 젊은 사람들이 다 그랬지만 직장에서 노동운동을 했어요. 한국철강이 생긴 뒤에 역사상 처음으로 쇳물을 끓이는 전기로를 14일 동안 세우기도 했었죠. 서울·경기 부천·광주 지역으로 지원 투쟁도 나가고 그러니까 경찰 미행조가 따라붙고 그랬거든요. 경찰이 우리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당신 아들이 빨갱이 물이 들었다느니 뭐 그런 얘기를 하고 그랬다는데, 아버지가 그때 '놔두소, 뭐 가가 알아서 하겠지'라고 하셨다는 거예요. 연극한다고 말한 뒤에는 이제 잡혀가진 않겠구나 싶어서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어요. 나중에는 아들이 연극한다고 주변에 자랑하시곤 했어요. (웃음)"


철강업계 노동자에서 연극인으로 전업한 뒤 문제가 된 건 역시 생계였다. 하지만 그는 결심했던 대로 꿋꿋하게 갈 길을 갔다. 매년 무대에 올랐다. 지금까지 그가 참여한 작품은 40여 편. 그간 무대 위에서 40여 명의 삶을 연기한 셈이다. 27살 때부터 아버지와 노인 연기를 많이 했다. 멋들어진 역을 맡아본 적은 없었지만, 지난해에는 <돈과 호태>라는 작품에서 아버지 역인 호태를 연기해 제39회 경남연극제에서 연기대상을 받았다. 그는 이 상이 가장 기억에 남고 의미 있는 상이라고 회상한다.

고대호 배우 공연 모습. /극단 미소


고향서 농사지으며 공연 병행
"후배들 불러줄 때까지 계속"


그에게는 눈에 띄는 이력이 하나 있다. 배우이기 이전에 그는 농사꾼의 삶을 살고 있다. 고향인 경북 상주에 있는 4000평대 땅에서 자두·복숭아나무를 키운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 농사꾼이어서 50대에 들어서면서 농사일을 시작했다. 상주시 공성면 고향 집에서 일주일에 2∼3일씩 지낸다. 밭에 가지 않아도 될 때는 창원 집에서 생활하며 작품 연습하거나 극단 업무를 보는 게 일이다.


그는 앞으로도 "농사를 지으면서 연극 무대에 설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후배들이 불러줄 때까지 무대에 오르는 게 목표"라고 덧붙였다. 연극의 매력을 묻자 그는 '희열'이라는 두 글자로 답변했다. 무대에서 희열을 느낀다는 설명이다. 하면 할수록 어렵고 보통 까다로운 일이 아니건만, 무대에 오르는 걸 즐기면서 사는 까닭이다.


"창원 집에서 상주까지 180㎞ 정도 나와요. 저녁에 연습 마치면 다음 날 농사를 지으러 가는 거죠. 밭에 약을 치고 창원으로 와서 연습하고 그래요. 학창 시절 농업을 좋게 평가하는 은사님 얘기를 듣고 매력을 느껴서 언젠가 농사를 지어야지 생각했었는데 50대가 돼서 시작한 거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니까 좋죠. (웃음) 연극은 마약 같아요. 힘들다가도 대본을 받고 나면 내가 맡은 인물이 궁금해지기 시작하거든요. 배역을 어떻게 창조할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이 매력있는 것 같아요. 후배들이 불러줄 때까지 계속 지역에서 무대에 오르는 게 목표예요."



이 글은 경남도민일보 지면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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