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를 읽어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이 곡은 연인이 없는 시간에 추억을 떠올리며 연인이 있는 시간을 느끼는 노래입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떠올리고 있는 연인과 함께 했던 시간은 과거에 존재했던 사건입니다.
어째서 연인이 없는 시간에서야 연인이 있는 시간을 느끼게 된 것일까요?
철학의 본질주의자들은 대부분 눈앞에 보이는 이 세계를 부정합니다. 눈앞의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진리값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본질주의는 눈앞의 것을 부정하고 저 멀리에 본질이 있다고 말하면 본질주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물의 배후에 그 사물을 사물이게끔 하는 본질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 곡도 본질주의적 측면을 담고 있으므로, “저 멀리를” 바라보며 “하늘의 푸르름”을 눈으로 좇으면서 시작하네요.
연인과 만났던 거리나 그와 마셨던 커피, 혹은 그가 좋아했던 옷을 바라보면서 그 배후에 존재하던 연인과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는 것이죠.
그러므로 지금의 시간은 과거에 존재했던 사건을 통해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과거존재성”(저는 과거존재성이라고 배웠는데 요새는 과거성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이라고 합니다.
이 과거성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먼저 본질주의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1. 존재가 본질이고 생성(운동)은 가상이라는 견해(플라톤, 칸트)
2. 생성(운동)이 본질이고 존재는 가상이라는 견해(헤겔, 베르그송)
플라톤의 경우 내 눈앞의 이것이나 저것에 대해서 부정하고 저 멀리에 본질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운동하는 세계(가상)를 부정하고 존재의 세계로 넘어가버립니다. 그래서 플라톤주의로부터 기독교가 나온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변화하는 세계를 부정하고 영원한 천상의 세계로 넘어갑니다.
이와 반대로 운동이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헤겔의 경우는 꽤나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헤겔은 가상으로부터 진리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상부터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헤겔이 죽은 이후 헤겔학파는 완전히 분해됩니다. 언제 헤겔이 유행하기라도 했어?라는 식으로 분해되고 젊은 사람들만이 헤겔을 읽었죠. 그중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열심히 읽어 자신의 학문을 수립한 사람이 청년 마르크스였습니다. 마르크스의 이름을 들으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이 헤겔 좌파를 구성합니다.
그런데 후대에 딜타이로 오면 헤겔의 핵심은 청년기의 신학논집에 있다고 하여 신학자 헤겔의 종교철학적 측면이 주목받게 됩니다. 헤겔이 신학대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그때의 사상이 본모습이라고 본 것이죠. 이 딜타이를 열심히 읽어 자기만의 헤겔상을 구상한 사람이 칼 슈미트입니다. 그에 의하면 헤겔은 역사의 급격한 변화운동에 저항하는 “카테콘”입니다. “카테콘”은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만, 신의 논리를 거부하는 자에 대항하여 영원한 진리를 수호하는 존재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헤겔이 이렇게 이해되는 이유 중 하나가 그의 시스템에 있습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통해 멍청이가 지혜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는데요. 이렇게 지혜에 이른 존재는 마침내 천상의 시스템에 들어가는데 그것이 논리학입니다. 논리학은 정신의 입장, 즉 신의 입장에서 세계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신비주의적으로 헤겔을 해석하는 쪽에서는 이 논리학을 창세기나 유대교 신비주의 문헌인 카발라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우주창조의 원리가 들어있다고 보는 것이죠.
이 논리학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반성”입니다. 이 부분이 헤겔 철학의 진면목을 이룹니다. 이 부분을 세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논리학에서 Dasein(Da, 거기에 + Sein, 있는 존재) 정재定在는 현재 여기에 있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제 눈앞의 컴퓨터나 필기도구나 블루투스 이어폰이나 키보드나 모두 정재죠. 저는 정재로 배웠습니다만, 요새는 현존재라고 많이 쓰이는 듯하군요.
이 현존재는 스스로를 규정하기 위해서 자기가 아닌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컴퓨터가 컴퓨터이기 위해서는 컴퓨터가 아닌 모든 것을 부정해야 컴퓨터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컴퓨터를 알기 위해서
컴퓨터가 아닌 모든 것을 부정합니다.
그러면 컴퓨터만이 규정됩니다.
그런데 그 자체만으로는 컴퓨터=컴퓨터다라는 공허한 규정만이 남게 되므로, 여기서 컴퓨터의 본질을 확실히 알기 위해서는 눈앞의 컴퓨터를 다시 부정해야 됩니다.
내 눈앞의 컴퓨터를 부정하다보면 이 컴퓨터의 구성요소들이 드러납니다. Cpu, 메인보드, 메모리, 컴퓨터 케이스 등등... 이런 것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컴퓨터를 컴퓨터이게끔하는 과거의 구성요소들이 나옵니다. 컴퓨터는 과거에 존재했던 부품들의 종합으로 인하여 컴퓨터일 수 있었던 것이죠. 과거존재들의 성분을 살펴보면 컴퓨터라는 종합이 나옵니다. 과거에 있었던 것들이 지금 여기에 있는 현존재를 구성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이 이중의 부정입니다. 헤겔 철학이 부정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이중의 부정을 우주 전체로 넓혀서 파악해봅니다.
내가 지금 존재하는 이 시간대는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진리는 눈앞에 바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시간의 저 너머에서부터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죠. 진리는 과거부터 현재, 미래를 거쳐 영원히 존재하는 무시간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을 부정하고 지금의 시간을 있게끔 만들었던 과거로 돌아갑니다. 정신의 운동을 통해서요.
지금 이 거리, 지금 느끼고 있는 바람, 지금 앉아있는 의자, 모두 과거에 어느 순간부터 존재해왔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사물들이죠.
각각의 개별자들은 만들어질 때 목적이 없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른 채 우주를 방황합니다.
거리, 바람, 의자 모두 내가 앉아서 느끼고 있는 현 시간대의 존재자들입니다. 이 존재자들이 내가 지금 앉아있는 이 공간과 시간에 영향을 끼치고 있죠.
그런데 과거 시점부터 거리, 바람, 의자는 모두 내가 지금 앉아서 과거를 생각하게끔 만들어준다는 목적으로 인해 존재해왔던 것입니다. 나는 이 거리의 벤치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모든 존재자들은 내가 본질을 생각할 수 있게끔 미리 준비된 존재자들인 것입니다.
즉 각자 사물들의 목적은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던 것입니다. 이 사물들은 나에게 본질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끔 그 시작점부터 결정되어있던 목적에 의해 운동하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내가 이 거리의 의자에 앉아서 바람을 맞지 않았다면 그들은 영원히 자신의 목적을 알지 못한 채 우주를 방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내가 그들에게 목적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의 존재는 인간에게 진리를 전달해주는 사물로 격상됩니다. 거리, 바람, 의자는 나에게 진리를 전달한다는 목적으로 인해 우주를 방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제각각의 사물들이 하나의 점에서 만나 모두가 진리를 목적으로 유영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마침내 주체가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 영원히 계속될 진리를 사물에게 부여하고, 그 순간 모든 것들은 의미 있는 사물이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단일한 목적, 진리를 깨닫게 한다는 목적을 위해서 지금까지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것이 가상으로부터 드러나는 존재의 본질, 진리의 순간입니다.
연인과 함께 하는 그 순간에는 목적을 모릅니다. 둘은 만나서 웃고 싸우고 다투다가 다시 웃고 싸우고 이내 헤어집니다. 그런데 지금 모닝커피를 마시는 순간의 고독, 그가 좋아했던 옷들을 바라보는 순간, 맨얼굴로 거리에 나온 순간, 이 모든 현재의 순간들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과거에 그와 함께했던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나는 지금의 고독과 방황의 순간을 연인과 함께 있던 시간이 없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따라서 현재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느끼는 진리는 과거부터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내면의, 연인과 함께 있던 순간에서부터 만들어지고 있던 진리인 것입니다. 이 고독과 방황과 쓸쓸함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의 현재가 있게 된 것은 과거 때문이죠. 즉 과거부터 지금까지, 또 미래까지 영원할 목적 때문입니다. 그 목적을 깨닫는 순간이 바로 진리의 순간입니다.
이것이 “반성”의 역할입니다. 인간은 회고와 반성을 통해서 현재의 사건들은 과거부터 계속되어왔던 목적의 운동을 통해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러한 존재의 과거존재성을 설명하는 곡이기 때문에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가 깨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음 곡은 더 확실하게 So long, 작별인사를 보내는 곡이 나오네요.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인류의 지혜가 시작되었듯이, 길가메쉬는 불로초를 잃어버린 이후에야 엉엉 울면서 모든 존재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필멸을 인식하게 되죠. 모든 진리는 원래의 사건과 작별하고 나서야 아주 뒤늦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연인이 있는(없는) 시간은 아름답게 되는 회상의 시간을 찬미하며 끝납니다.
나카모리 아키나가 불안정한 시간 속에서도 자신감이 있었던 이유는 자기 스스로에게 목적을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자기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확신이란 스스로 나에게 부여하는 내재적 목적입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여러 가능성 중에서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자기확신을 스스로 부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이렇게 실현된 목적은, 사실 스스로에게 부여한 내재적 목적이며 동시에 나의 존재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할 목적인 것입니다.
참고문헌
소광희, 이석윤, 김정선, 철학의 제문제, 지학사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라티오출판사
글렌 알렉산더 맥기, Hegel and the Hermetic Tradition, 코넬대학교 출판부
알렉상드르 코제브, Introduction to the reading of hegel헤겔독해입문, 제임스 니콜스 옮김, 앨런 블룸 엮음, 코넬대학교 출판부(국역본 : 역사와 현실변증법, 설헌영 옮김, 한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