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글의 모든 인용은 "프랑수아 줄리앙, 탈합치, 이근세 옮김, 교유서가"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글은 책의 요약이며 천사의 행방에 관련된 마지막 결론이다.
1.
공동체는 안정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의 지구공동체는 세계화(지구화), 전 세계적 자본주의 시장, 세계적 미디어의 출현, 어디서나 접근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활성화 등으로 구성된다. 이를 한 단어로 세계화(지구화)라고 부를 수 있다. 세계화는 다양한 관념들의 연합이며, 이 개별적 관념들은 “세계화”라는 개념 하나에 합치됨으로써 작동한다. 프랑수아 줄리앙은 자신의 저서 “탈합치”에서 하나의 연합작용을 통해 안정적으로 “합치”되어 있는 세계적 질서에 균열을 내려고 한다. 이 균열의 목표는 “미래를 다시 여는 것”이며,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항상 일상에 만족하지 못한다. 과거를 회상하며 그 순간을 그리워하거나, 혹은 미래를 투영하며 그 순간을 갈구한다. 따라서 삶은 안정적인 합치상태로부터 벗어나 바깥으로 나아감으로써 탈합치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필레보스”에서 이야기했듯이,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장 기초적인 의미에서, 현재 느끼는 상태와의 합치 불가능성으로 인해 스스로를 [...] 도약 상태 속에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항상 무언가를 욕망한다. 배고프기 때문에 배부른 상태를 욕망한다. 인간은 지금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욕망한다. 지금의 무언가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이처럼 인간은 현재의 상태를 부정하고 다른 가능성을 향해 이탈하려고 한다. 삶이란 이러한 합치로부터 불합치로, 바깥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합치되어 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나 탈합치를 욕망하고 그로인해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연속, 그것이 삶이다. 따라서 삶의 과정은 동시에 예술의 과정과 연결된다.
탈합치는 피카소의 그림 “바르셀로네타 해변”을 분석하면서 제시된다. 이 그림은 “화폭과 어긋나고 조금이나마 기울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피카소의 이 그림은 "화폭과 합치하지 않는다.” 본래 회화의 목표는 비례와 안정성이었으나, 피카소는 그로부터 일탈하여 프레임으로부터 어긋남, 탈선, 탈합치를 담아낸다. 이로부터 기존의 형식에 순응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균열이 발생한다. 이 균열로부터 나타나는 무언가는 아직 이름붙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잠정적으로 탈합치라는 이름을 붙이도록 하자.
탈합치는 예술과 실존의 연합이다. 실존(exister)은 ex-sistere로서, “바깥(ex)에 서다(sistere)”라는 뜻을 가진다. 합치와 적응의 바깥에 서는 것, 탈합치는 동시에 실존하는 것이다. 안정적인 일상생활로부터 이탈하여 여행(휴가)을 떠남으로써 자기의 본래 모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이러한 쇄신의 과정은 동시에 탈합치라고 부를 수 있다. 일상적인 습관과 사유의 방식으로부터 이탈하여, 바깥에 서는 것이 곧 실존이며, 삶의 과정 그 자체이다.
안정적인 것을 거부하고 과거의 것을 사유하여 미래의 가능성으로 나아가려면, 현재의 삶을 전적으로 부정해야 한다. 부정을 사유하지 않으면서, 안정적인 삶만을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안정적인 삶이란 영원히 지속되는 고요함이 아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고요함이란 끊임없는 부정을 거치며 만들어진 하나의 가능성이다. 애초에 먼저 부정이 있다. 탈합치가 먼저 존재한다. 먼저 부정, 탈합치가 있고, 그 다음에 안정이 올지도 모른다는, 그런 가능성만이 열려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합치된 것으로부터 이탈하여 탈합치하는 운동, 삶을 살아가면서 영원히 다른 가능성으로 이탈하려는 운동이 삶 그 자체를 이루게 된다. 결속된 안정적인 것(삶)으로부터 이탈하여 “탈결속을 활용하고 탈결속의 정합성을 철학 가운데 기입한 것은 분명 헤겔의 위대한 공헌이다. 헤겔에게 있어 부정은 내적 불일치 또는 자아와 자아와의 차이가 된다. 이런 차이로 인해 자아는 견고한 자아로서 자기 존재 안에 무한정하게 머무는 대신 스스로 ”자신의 이방인“이 되면서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쪽으로 간다.”
다만 헤겔은 부정의 힘을 통해 새로운 생성의 가능성을 논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체계를 만들었다. 프랑수아 줄리앙은 “체계의 사망”을 이야기한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불안정마저 포함하여 안정적인 체계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성의 매뉴얼”은 종언을 고했다. 그러한 모든 안정적인 질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탈합치가 제시된다.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신 또한 탈합치이다. 말씀과 신은 하나였다. 그 동일자로부터 신은 스스로 자기분열하여 “아들”로 탈합치한다. 신은 아들로 자신의 바깥에 섬으로써 자신의 말씀을 세상에 실현한다. 동시에 아들은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써 생명이라는 합치로부터 탈합치하여,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씀을 실현한다. 신은 자신을 타자에게로 열어젖히는 탈합치 그 자체이다.
예술과 실존은 안정적인 질서에 균열을 냄으로써 가능성의 세계를 열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안정된 세상의 바깥으로 나아가, 그 바깥으로부터 안정된 것을 바라보는 시점의 변화를 준다. 그 변화로부터 미래를 향한 또다른 가능성이 열린다. 따라서 예술과 실존이 가능성을 발견하는 순간은 “봉인되었던 경첩에서 풀려나올 때”이다. 예술과 실존은 안정적인 질서로부터 이탈하여 바깥에 서는 탈합치를 실천함으로써 “자기의 저항에서 무한을 전개”한다.
2.
마지막으로 모든 내용을 정리하면서 마무리한다.
나카모리 아키나는 1980년대에 주로 활동하면서 거품경제 시기의 안락함에 안주하지 않았다. 거품경제 시기의 안락함으로부터 빠져나와 균열을 만들고 멜랑꼴리를 사유한다. 임박한 파국으로부터 비롯된 멜랑꼴리라는 지점에서 파울 클레와 벤야민이 주목했던 새로운 천사의 멜랑꼴리와 일치한다. 천사는 다가올 파국을 먼저 인식하고 멜랑꼴리에 이른다. 다만 그 천사는 인간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아파한다.
안정적인 사이버스페이스, 네트워크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미래세상이라면? 그곳에서 천사는 어디서 출현할 것인가? 천사는 우리를 이끌고 초월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천사는 균열 그 자체를 지시한다. 안정적인 네트워크의 공간으로부터 이탈하여 더 나은 지점으로 상승하도록, 이탈하는 초월을 도와주는 인도자가 바로 천사이다.
마지막으로 천사는 파국을 온 몸으로 막아내고 포용과 화해를 통해 다시 이 세상의 탈합치(미래가능성)가 가능하도록 자기희생한다. 자기의 생명을 걺으로써, 목숨을 건 투쟁을 함으로써 악과의 화해를 이루어내고 천사는 선의 승리를 향해 전력한다. 그러기위해서는 자기희생 - 죽음의 과정을 향해 자신의 생명을 탈합치해야 한다. 이것이 천사가 제시해 준 생존전략이었다.
아버지가 사라진 시대, 네트워크의 비대화로 인해 자아가 축소된 사회에서 우리는 과거의 위대한 것들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다. 따라서 예술을 통해 위대한 행적의 미메시스가 일어나거니와, 그 미메시스를 보고 조그마한 실천이라도 할 수 있다면 훌륭한 실존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아버지가 사라진 시대, 권위가 사라진 시대, 우리는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자아가 축소되어 어쩌면 방향을 상실해버리고 목적 조차 사라져 공허한 사회의 도래를 맞이하였다. 따라서 우리의 시대는 더 나쁜(ou pire) 시대가 되었다.
더 나쁜 시대를 바꿔나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더 나쁜 시대의 안정적 합치에 만족하지 않고 탈합치해야 한다. 질질 끌려다니는 자아를 다시 이 쪽으로 끌어보도록 하자. 끌려다녔던 것을 다시 자아의 중심의 한 켠으로 위치시키자.(중심이 아니다) 자아의 변두리로 나아가보도록 하자. 이러한 새로운 위치정립을 통해 자아가 새로운 시선을 가지게 된다면 거기로부터 탈합치가 일어나고 세상은 새로운 시선으로 열린다.
여기서 제시한 예술은 모두 일본의 사례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편향되어 있긴 하지만, 거기에는 하나의 뒷이야기가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확고한 중앙이 부재한 나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예술의 양식이 가능하다. 이 나라는 단독으로 정립되어 있는 중앙의 확실한 규정점이 없다. 모두가 책임을 회피하고, 무한히 회피하는 책임의 구덩텅이 속에서 결정은 유보되고, 최종적으로 내려진 결정은 최악의 것이 된다. 따라서 변두리로 이탈하여 끊임없이 탈주하면서, 자아를 질질 끌면서 변두리로 나아가면서 행하는 예술이 가능하다. 최악의 체제이기 때문에 오히려 최고의 예술이 가능하다. 전적으로 모순된 사회의 진리를 보여준다.
우리시대에, 네트워크는 더이상 중앙의 관리를 통해 조율되는 악기가 아니라 융합적 멜로디를 통해 우리를 억압하는 고문수단이 되었거니와, 중앙으로부터 이탈하려는 다양한 시도들로부터 우리는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수단을 잘 살펴서 하나의 탈합치로 삼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탁월한 창조자이다.
3. 야쿠시마루 에츠코 - 나는 인류
정말로 마지막이다.
인류는 참으로 오랜 길을 걸어왔다. 그동안 많이 고생했고, 많이 파괴했고, 많이 사랑도 했지만, 많이 죄악을 저지르기도 했고, 번영하기도 했다. 인류의 번영은 끝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고갈된다던 석유는 더 발견되었고,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온난화의 문제도 해결될지 모른다. 이러한 무한팽창의 종착점은 어디일까?
무한히 팽창하면 무한한 멸망에 이른다. 마치 암세포처럼 말이다. 무한히 팽창하여 정교한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기술문명의 정밀한 결합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의 생활이 윤택해지고, 효율성이 극에 다다르면 그것으로부터 멸망이 온다.
이 곡은 멸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다시금 인류의 가능성을 시험하려고 한다. 미생물에 음악정보를 담은 유전정보를 넣어 영원히 음악을 보전하겠다는 과학주의적 양식의 극한에 이른 시도를 통해 거꾸로 인류의 멸망이라는, 프레임에 어긋나는 내용을 도입한다. 전자음과 비트로 이루어진 멜로디와 화면의 퍼져나감, 이것을 통해서 인류의 사랑과 기억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가 고정관념으로 가지고 있는 흐름으로부터 이탈하고 탈선하여 새로움이 표현된다. 현대예술은 기술의 발전을 이용하여, 안정적 질서에 균열을 냄으로써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한다. 그 선물을 수용하는 것은 오로지 감상자의 몫이며, 그 선물을 통해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것 또한 감상자의 실존적 결단에 달려있다.